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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구원’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

등록 2012-01-08 20:14

민용근의 디렉터스 컷
열한살 때였나. 그때의 순간들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곳은 어머니의 장례식장.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나는 장례식장의 상주였다. 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왔고, 나는 그들을 맞이했다.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대신 윗니로 아랫입술만 계속 깨물고 있었다. 울지 않는 나를 보며 매정하다고 수군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외할머니가 위로의 의미로 내 어깨를 만져주었다. 웬일인지 난 그 손길조차 싫어 거칠게 뿌리쳤다. 따라오지 말라고 소리치곤 베란다로 뛰쳐나갔다. 베란다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이 든 순간, 그제야 비로소 울음이 터졌다. 눈물과 통곡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한참을 서럽게 울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눈을 떠보니 시야 가득 보이는 낯익은 얼굴. 꿈꿨어? 현실 속의 어머니가 나에게 묻고 있었다. 잠을 자다 갑자기 엉엉 우는 내 소리에 잠이 깼다고 하셨다. 손으로 얼굴을 만져보니 양 볼 모두 눈물범벅이었다. 다행히도 꿈이었다.

어머니가 다시 주무시고, 난 까만 천장을 바라보며 속으로 되새겼다. 아직 옆에 있다. 아직 엄마가 옆에 있다. 그 평온한 안도감을 충분히 만끽한 뒤에, 꿈속에서 느꼈던 그 이상한 기분을 조심스레 다시 떠올려 보았다. 엄마 없는 세상, 울음이 터졌던 그 베란다에서 느꼈던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한 기분. 꿈이긴 했지만 그때의 고통스러운 기분은 너무도 생생하여, 마음속 상처처럼 선명한 자국으로 남았다. 그 뒤 내겐 버릇 하나가 생겼다. 마치 어둠의 유혹에라도 이끌리듯, 그 꿈에서 느꼈던 고통스런 기분을 꺼내보는 버릇이었다. 희한하게도 그때의 느낌이 생생히 남아 있었기에 그 기분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참을 외로움과 절망으로 가득 찬 상상 속의 ‘저 곳’에서 몸서리치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엄마가 있는 ‘이곳’의 안도감을 만끽하곤 했다. 그때마다 난 이것이 현실이라면 ‘저곳’에서 ‘이곳’으로 돌아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르덴 형제 감독의 영화 <자전거 탄 소년>(19일 개봉)에는 ‘이곳’과 ‘저곳’을 끊임없이 오가는 소년이 등장한다.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게 된 소년 시릴. 그는 현실을 부정하고, 아버지라는 최초의 안식처를 향해 자꾸만 돌아가려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돌봐주던 이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소중한 믿음을 주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비정한 현실을 경험하기도 한다. 시릴은 영화 내내 자전거의 페달을 힘껏 밟으며, ‘이곳’의 안식을 향해 ‘저곳’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친다. ‘이곳’에 닿기 위한 시릴의 맹목적인 믿음과 쉴 새 없는 움직임이 오히려 그 자신을 극한으로 내몰 즈음, 그는 작은 희망 하나와 만나게 된다.

시릴이 골목을 돌아 사라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엉뚱하게도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사형수 탈옥하다>란 영화가 떠올랐다. 구원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노력으로 자유를 얻게 되는 주인공 퐁텐처럼 이 영화의 시릴 역시 마음의 안식처를 찾기 위해 쉼 없는 페달링을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를 얻기 위해, 그리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그들이 버리지 않았던 일관된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자유와 사랑이라는 빛을 만나게 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믿음이란 건, 참으로 고통스럽고도 찬란한 것이다.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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