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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안개 속의 풍경’ 너머 그리운 목소리가…

등록 2012-01-29 17:41

그리스 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
그리스 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
민용근의 디렉터스 컷
“아빠에게. 우린 당신을 본 적이 없지만, 당신이 그립습니다. 가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내 뒤에서 발자국 소리를 들은 것 같아요. 당신의 발자국 소리를. 돌아봤을 땐 아무도 없었죠. 그때 너무 외롭다고 느꼈어요. 우린 당신에게 짐이 되고 싶진 않아요. 우린 단지 당신을 알고 싶을 뿐이에요.”

11살 소녀 불라와 5살의 남동생 알렉산더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아빠를 찾아 무작정 독일로 떠난다. 그러나 그 여정 속에서 남매가 만나게 되는 그리스의 풍경은 무척이나 쓸쓸하고 황량하다.

울며 결혼식장을 도망쳐 나오는 신부, 차디찬 눈 위에서 숨을 내쉬며 죽어가는 하얀 말, 공연장을 구하지 못해 떠도는 유랑극단의 늙은 단원들. 누나 불라는 길에서 만난 트럭 운전사에게 강간을 당하고, 어느 청년에게 느낀 첫사랑은 가슴 아픈 결말을 맞는다. 하지만 온갖 고난 속에서도 남매는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아빠를 찾아 쉼 없이 걸어간다.

그리스 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사진)의 1988년 작 <안개 속의 풍경>이다. 1996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대학 2학년생이었던 나는 부산 남포동의 어느 단관 극장에서 이 영화를 처음 보았다. 영화 속 풍경과 흡사한 오래된 극장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요즘 만나기 어려운 대형 스크린 때문이었는지, 그때 나는 영화에 온전히 몰입했다. 영화를 집중해서 봤다,는 정도가 아니라, 한참을 안개 속에서 여행하고 온 기분이 들 정도였다. 거대한 공장 굴뚝과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오던 잿빛 연기, 육식 공룡 같은 황량한 세상 속을 끊임없이 걸어가던 두 아이의 종종걸음. 그 안쓰러운 몸짓과 눈빛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다. 그 후로 영화의 테마음악으로 쓰인 오보에 선율이라도 우연히 듣게 되면, 영화 제목을 떠올리기도 전에 마음 한구석이 먼저 먹먹해져 오곤 했다.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의 강렬한 느낌을 간직하고픈 마음에 한동안 이 영화를 다시 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며칠 전, 다시 영화를 보게 되었다. 앙겔로풀로스 감독이 최근 타계했다는 기사를 접한 뒤였다. 향년 76. 신작 <디 아더 시>(The other sea) 촬영 중, 오토바이와의 충돌 사고로 인한 갑작스러운 죽음이라고 했다. 만난 적 없는 것은 물론이고 얼굴조차 희미한 그였지만, 그 소식을 접하는 순간 이젠 세상에 없는 먼 나라의 노감독이 무척이나 그리워졌다. 16년 만에 보는 것이었지만, <안개 속의 풍경>은 여전한 힘을 갖고 있었다. 마음이 먹먹해졌고, 여러 차례 눈앞이 흐려졌다. 빠른 호흡에 익숙해져 가는 세상 속에서, 오히려 그 특유의 느린 호흡은 더욱 빛나는 것 같았다. 영화를 본 뒤에도, 불라와 알렉산더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시 영화를 되돌려, 상상 속 아빠를 향해 이야기하던 남매의 대사를 받아 적은 뒤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대사들은 세상에 남겨진 사람들의 목소리, 혹은 나의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내가 그에게 말한다.

“우린 계속 여행중이에요. 모든 게 너무 빨리 지나가요. 도시들. 사람들. 세상들. 언젠가 우린 미아가 되겠지요. 감독님 나는 당신을 본 적이 없지만, 당신이 그립습니다.”

잠시의 침묵 뒤, 안개 속 풍경 너머에서 낯익은 음성이 들려온다.

“너는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가는 듯하지만, 네가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걸 난 알아. 난 네가 있는 곳을 알아.”


영화 속 대사를 빌려 그가 남기고 간, 위안의 목소리다.

민용근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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