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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단단한 눈빛의 그녀들을 보았나요

등록 2012-02-26 20:55수정 2012-02-26 20:56

김민희, 영화<화차>
김민희, 영화<화차>
민용근의 디렉터스 컷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은 단단한 눈빛을 좋아한다.

바늘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고, 세차게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눈빛. 특히 외적으로 연약해 보이는 여성 캐릭터에게서 그런 단단함이 보일 때, 나는 그 영화와 인물에 매료되곤 한다. ‘에밀리 드켄’이 연기한 ‘로제타’가 그랬고, ‘리나 레안데르손’이 연기한 <렛 미 인>의 흡혈귀 소녀 ‘이엘리’가 그랬다. 근래에는 단연코 <밀레니엄>의 여주인공인 해커 ‘리스베트 살란데르’가 떠오른다. 이 배역을 맡은 할리우드판의 ‘루니 마라’와 스웨덴판의 ‘노미 라파스’ 모두 ‘김꽃두레’(요즘 케이블채널에서 인기를 모으는 개그우먼 안영미의 캐릭터)를 능가하는 시크하고 단단한 눈빛으로 영화 전체를 움켜쥐었다. 만일 이 눈빛들이 자신의 강인함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금세 잊혔겠지만, 과거의 상처를 통해 만들어진 삶의 인장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수 있었다.

최근 보게 된 두 편의 영화에서 ‘단단한 눈빛 리스트’에 추가될 두 명의 인물을 발견했다.

첫째는 윌리엄 니컬슨 감독의 1997년작 <파이어라이트>에 등장하는 ‘엘리자베스’다.

이 영화의 주연을 맡은 소피 마르소는,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식물인간 아내를 둔 어느 지주의 아이를 대신 낳게 된 대리모 ‘엘리자베스’를 연기했다.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떠나보낸 아이를 그리워하던 엘리자베스는, 7년 뒤 자신의 딸을 찾아내고 결국 그 집의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친모인지 알지 못하는 어린 딸은 가난한 신분의 가정교사라는 이유로 그녀를 무시하고 거부한다. 그 모진 시간 속에서 엘리자베스는 조금씩 자신의 딸을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엘리자베스가 가정교사로서, 딸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그녀는 딸의 노골적인 멸시에 눈물 흘리는 대신, 딸의 얼굴에 물감을 끼얹고 곧바로 자신의 얼굴에도 똑같이 물감을 끼얹는 식의 엄격함과 단호함으로 아이를 대한다. 끓어오르는 모성을 누른 채, 그 단단한 눈빛으로 아이를 변화시키려 노력한다. 남성 중심의 보수적인 시대 상황에서 그녀가 딸에게 가르쳐줄 수 있었던 유일한 본능은 아마도 그 단단한 눈빛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차갑기만 했던 딸에게서 ‘엄마’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비로소 엘리자베스의 단단한 눈빛은 스스로 무너진다. 단단함이 빗장을 풀고 여린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의, 그 뜨겁고도 따뜻한 감정이 무척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튿날 보았던 <화차>(3월8일 개봉)에서도 그런 강렬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아픈 과거로 인해 다른 사람의 인생을 훔쳐 살아야 했던 어느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에서 김민희(사진)는 여러 겹의 베일에 가려진 ‘차경선’이라는 인물을 연기했다. <화차>에서 그녀는 순수함을 간직한 소녀의 모습부터 인생의 극한을 경험하는 여성의 모습까지 다양한 연기의 스펙트럼을 훌륭하게 표현해냈다. 그러나 극과 극을 오가는 그녀의 변화무쌍한 연기변신보다 더욱 인상적이었던 건 영화의 후반부, 그녀의 단단한 눈빛이 빛나던 어느 순간이었다. 힘겹게 부여잡고 있던 자신의 인생을 지탱해줄 수 있는 마지막 마지노선. 무너지기 직전의 애절하고도 단단한 그녀의 눈빛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큰 이미지로 남았다.

가장 소중한 것은 가장 깊숙한 곳에 감춰두기 마련이다. 로제타와 이엘리와 리스베트와 엘리자베스와 차경선. 그녀들의 단단한 눈빛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건 그녀들이 그 속에 봉인하려고 했던, 오직 한 사람에게만 보여주고 싶던 자신의 내밀하고도 여린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민용근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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