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모 가츠히로 감독의 <스팀보이>
‘스팀 보이’ 다음달 4일 개봉
<아키라>라는 단 한편의 작품을 통해 사이버 펑크 애니메이션의 대표 작가 반열에 오른 오토모 가츠히로(51) 감독의 두번째 장편 <스팀보이>가 8월4일 개봉한다. <아키라> 이후 무려 16년 만에 내놓은 작품이다. 일단 <아키라>의 골수팬들에게 예방주사 차원으로 말하자면 <스팀보이>에는 <아키라>에 철철 흐르던 암울함과 허무함의 분위기는 별로 없다. 주인공 스팀보이와 그를 돕는 스칼렛은 오히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년소녀 커플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과학과 진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문명의 위협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나 거대한 스케일로 화면을 휘감는 파괴의 미학은 여전히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요란하게 돌아가는 공장의 기계소리와 굴뚝에서 뿜어져나오는 검은 연기가 ‘밝은 미래’를 약속하던 19세기 중반의 영국.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어 기계 조작과 발명에 비상한 재주를 가진 소년 레이 스팀은 어느날 미국에 있던 할아버지가 보낸 공 모양의 기계와 설계도를 받는다. 그러나 레이는 곧 기계를 빼앗으려는 남자들에 의해 쫓기게 되고 이들에게 납치되어 갇힌 거대한 성에서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를 만난다. 스팀볼이라고 말하는 공 모양 기계는 레이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절연하게 만들고 또 이 기계를 필요로 하는 무기제조 회사가 어린 레이에게 총을 겨누게 하는 원인이다. 초고압의 증기를 고밀도로 농축한 스팀볼은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에너지원이다. 스팀볼의 에너지로 아이들을 위한 놀이동산을 만들려던 할아버지와 달리 아버지는 무기회사와 결탁해 가공할 무기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무기회사는 당시 임박해있던 런던 만국 박람회에서 증기를 이용한 각종 무기들을 전세계에 팔아넘기려고 한다.
오토모 가츠히로 감독의 <스팀보이>
암울한 허무주의 색깔 뺐지만
19세기 영국 종횡무진 누비는
힘찬 화면의 힘 옛날 그대로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순진함을 경멸하지만 오로지 과학의 위대한 성취에만 빠져 자신의 성과가 자본과 손잡았을 때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내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도 순진한 것이다. 그는 “상식을 뛰어넘을 때만이 진보할 수 있다”고 반복해 말하지만 영화는 상식과 윤리를 결여한 진보 또는 과학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진중하게 보여준다. 영화가 이 위협을 보여주는 방식은 주인공 레이 스팀의 분투와 실제 스팀(증기)의 파괴력을 통해서다. 영화의 시작 부분, 방직 공장을 폭발 직전으로 몰아갔던 증기는 두시간 내내 스크린을 후끈하게 뒤덮는다. 특히 빅토리아식 궁전으로 위장한 거대한 스팀성이 움직일 때 인체의 핏줄처럼 복잡하게 뒤얽혀 있는 증기관들이 터질듯 울툭불툭 늘어나면서 그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의 긴장감은 숨이 멎을 정도다. 과학이라는 게 진보의 매혹과 파괴의 위협을 동시에 가지고 있듯이 <스팀보이>도 그 모순된 감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인류의 미래에 대한 묵시록적 경고를 담은 예술 작품들이 대개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데 비해 <스팀보이>가 19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건 공학의 발전이 인간의 삶에 가져왔던 흥분 역시 놓치고 싶지 않아서일 터이다. 레이가 굴리는 외바퀴 증기차나 집게발 증기선 등 영화에 등장하는 기기묘묘한 기계들이 그 매혹과 흥분을 잘 드러내준다. 그러나 역시 오토모 가츠히로가 만드는 최고의 아름다움은 건설이나 구축이 아니라 파괴에 있다. 거대한 스팀성이 무너져갈 때의 웅대함과 한 순간 런던을 감쌌던 얼음이 눈가루로 변하는 모습은 파괴라는 흉한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황홀함을 전한다. 사진 대원씨엔에이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