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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영화감독은 무얼 먹고 사나요?

등록 2012-05-06 20:46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민용근의 디렉터스 컷]
선거를 앞둔 지난 4월의 어느 날. 한 여론조사 기관으로부터 설문 전화를 받았다. 지지 후보와 정치성향 등에 관한 설문이었는데, 설문 뒤엔 응답자에 관한 간단한 정보 확인이 있었다.

“응답자의 직업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서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가끔 이런 상황이 되면 습관적으로 망설여지곤 한다. 내가 “영화감독이요”라고 수줍게 대답하자, 조사원은 무슨 신기한 생물과 마주친 양 갑자기 호기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영화감독은 무슨 일을 하는 건가요, 유명한 배우들이랑은 친합니까’ 등의 질문들. 이런 번외 설문을 즐기실 시간이 있으신가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는 범위 내에서 답을 해드렸다. 가만히 이야기를 들으시던 그분이 던진 마지막 질문. “그럼 영화감독은 무얼 먹고 사나요?” 음…. 이쯤 되면 심화학습이다. 발랄하게 “꿈을 먹고 살지요”라고 대답하려다, “그냥 이것저것 해서 먹고살아요”라며 얼버무렸다. 전화를 끊고 내 직업에 대해 생각하자니 좀 우울해졌다. 영화감독은 과연 무얼 먹고 사는 걸까. 난 왜, 내 ‘직업’에 대해 말할 때면 항상 망설여지는 걸까.

국어사전엔 ‘직업’의 뜻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생계를 위해 일상적으로 하는 일’. 하지만 나에게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은 ‘생계’를 위하지도, 그렇다고 ‘일상적’으로 하는 일도 아니다. 물론 영화가 나의 ‘생계’가 되고,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 되게 하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주변의 많은 영화감독들이 생계를 위해, 혹은 영화를 하기 위해 다른 일을 하고 있다. 나만 해도 생계를 위해 방송 프로그램 만드는 일과, 여러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고 있다. 사전적 의미에서 보자면 내 직업은 방송 피디(PD)이고, 영화감독은 취미나 특기 정도가 되려나.

상업영화 감독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진 않다. 끊이지 않고 영화를 찍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올림픽과 그 작품주기를 같이하는 많은 감독들에게 영화는 생계가 될 수 없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듯, 내가 영화감독을 감히 직업이라 부르지 못하는 이유이다.

이 넋두리는 비단 영화감독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일이 생계가 되지 못해 포기해야만 하는 많은 예술가들, 혹은 다른 직업군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과연 ‘우리’는 무얼 먹고 사는 것일까. 이 글이 결론이 있는 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실,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조차 거대 자본의 부속품처럼 되어가고 있는 요즘의 여러 상황들을 보며 글을 쓰게 됐다. 자신의 직업이 생계가 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직업적인 자존감도 견지하지 못한다면 이 직업이 주는 꿈과 희망은 어디에 있는 걸까.

고등학교 때 이 직업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할 무렵, 큰 영향을 준 어느 감독님의 말이 있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관객을 동원하고 영화제에 나가고 비평이 실리고 인터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는 것을 뜻하며, 혹독한 추위와 눈, 비, 진흙탕 속에서 무거운 조명기를 운반하는 것을 의미한다.’ 키에슬로프스키(사진) 감독의 이 말은 ‘영화감독이라는 것은 내게 너무 힘든 직업이었다’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아직도 이 말은 나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힘이 있다. 영화감독을 직업이라 부르기에 망설여지는 게 현실이지만, 그래도 나는 이 직업을 사랑한다. 어쨌건 우리, 외롭다 생각지 말고, 우울해하지 말자. 어차피 새벽 6시에 일어나 진흙탕을 걸어가야 하지 않는가.

민용근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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