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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여백과 함께 시간이 정지된 아다치 만화

등록 2012-05-18 19:52

<에이치투>(H2)
<에이치투>(H2)
[토요판] [TV +] 김성윤의 덕후감
지금 대한민국은 야구 공화국이다. 한번 ‘야빠’(열혈 야구팬을 뜻하는 야구 빠돌이·빠순이의 줄임말)가 돼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야구만큼 인생에 가까운 스포츠가 없다는 걸. 30%만 성공해도(물론 타격의 경우) 잘했다고 인정받는 스포츠는 야구밖에 없다. 게다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야구 명언처럼 우리 인생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아다치 미쓰루의 <터치>나 <에이치투>(H2·사진)는 야구만화를 빙자한 소년청춘성장인생만화다. 델리스파이스의 ‘고백’이란 노래도 <에이치투>를 모티프로 만든 거라니, 국내에서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이 만화가 얼마나 매혹적인지를 말이다.

“타임아웃이 없는 시합의 재미를 가르쳐 드리지요.” 아다치 마니아들은 이런 대사가 등장하는 <에이치투>를 보고 또 본다. 그러다 보니 어지간한 명장면 명대사쯤은 줄줄 외울 정도다. “중학교 때 제대로 싸우지 못했으니까, 히데오랑은….”(히로) “그야 당연하지. 같은 팀이었는 걸.”(히카리) “첫사랑을 걸고, 말야.”(히로)

아다치는 사람의 마음을 사물에 투영시키는 비상한 재주를 갖고 있다. 그 대상은 야구 자체일 수도 있고,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이 될 수도 있고, 워크맨 이어폰에서 새어나온 속삭임일 수도 있다. 그 덕분에 만화 속 캐릭터들은 웃음이나 울음을 ‘터트리지 않는다.’ 다만, 컷 곳곳에 채워진 은유들이 대신해서, 혹은 함께, 웃어주고 울어줄 뿐이다.

감정에 대한 극심한 절제는 그의 컷 사용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대사 없음, 표정 없음, 독백 없음이야말로 아다치 만화의 특징이다. 아다치는 설명하지 않고 단지 배치한다. 그는 오로지 컷 분할만 가지고도 인물의 심리와 상황의 맥락을 묘사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냈다. 그의 작품에서 목격되곤 하는 여백, 그것은 바로 여기서 기원한다.

그 때문에 때론 짓궂고 때론 아기자기하다. (나를 포함해) 아다치 팬들이 그의 만화를 자꾸 꺼내보는 이유 중에 바로 이러한 서정성이 자리하고 있다. 사실 요즘 감각에서 보면 이런 수법은 (아다치의 그림체만큼이나) 다소 구식일 수도 있다. 그러나 거꾸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터치>, <러프>, <에이치투> 같은 만화들에 고유한 소장 가치가 생기는 건 아닐까. 깊은 여백과 함께 시간이 정지되어 있지 않은가.

물론, 아다치 만화에 대한 세간의 평가에는 ‘소년’만화의 한계라는 지적이 빠지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아다치 자신이 “독자 서비스”라고 부르는 여성 신체를 대상화한 컷들은 ‘소년’들에게 관음증적 쾌락을 제공하는 대신 여성 독자들에겐 일종의 진입 장벽이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상적인 여성 이미지들을 제시하고 거기서 갈등하는 주인공의 (심적인) 여성 편력도 도마 위에 오르곤 한다.

그러나 오늘날 아다치의 연재만화(<크로스 게임>이나 <큐 앤드 에이>(Q and A) 등)를 소년들이 좀처럼 보지 않는다는 사실은 조금 신기한 일이다. 아다치의 만화는 (심리적 의미의) 40대를 바라보고 있을 성인 남성들에게서나 무한반복되고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요는 이렇다. 아다치 만화는 그 자체로 변함이 없건만 이제 소년만화가 아니라 성인만화가 됐다, 따라서 그의 작품세계에서 관건이 되는 건 섹슈얼리티가 아니라 오히려 시간의 문제다.

문화사회연구소연구원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연구원 김성윤
과거로 돌아가기, 물론 작가 자신은 어떠한 역사도 기록하지 않는다. 그의 시간은 고교 시절 고시엔(갑자원)으로 가는 길목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성인들이 (특히 아다치 팬들이) 어떤 시간을 그토록 그리워하고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는 점은 두고두고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그 시간이란 뭘까. 정지된 시간, 혹은 여백과 함께 흐르는 시간이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역사가 소거된 시간일 테고. 아다치의 만화는 일종의 반사경과도 같다.

문화사회연구소연구원 김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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