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귀여운 여인>
[토요판] [TV +] 김성윤의 덕후감
로맨틱 영화의 고전 <귀여운 여인>(1990). 떠오르는 장면은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프리티 워먼, 워킹 다운 더 스트리트~ 프리티 워먼~’ 노래와 함께 로데오 거리를 누비며 묻지마 쇼핑을 하는 줄리아 로버츠, 영화 엔딩에 백색 리무진을 타고 와 꽃다발을 건네주는 리처드 기어. 아마도 이 두 장면, 두 인물이 이 영화를 신데렐라 콤플렉스 영화로 만들었을 것이다. 백마 탄 왕자와 낭만적 사랑에 빠지고 동시에 신분상승을 이루는 내러티브 말이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 리처드 기어는 어떤 사람일까. 성격이 어땠을까. 직업은 뭐였을까. 혹시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이 영화를 적어도 세 번 이상 본 사람이거나 눈썰미가 남다른 분이실 게다. 다들 ‘귀여운 여인’에만 관심 있지 남자 주인공한텐 별 관심을 안 두더란 말이다.
먼저 성격. 주인공 리처드 기어는 요즘 말로 하자면 전형적인 차가운 도시 남자다. 호텔 펜트하우스에서 장기투숙하고 리무진에 몸을 실어 세계 도시의 상층회로를 옮겨 다닌다. 그런데 그는 놀랍게도 늘 주체할 수 없는 고독감에 젖어 있다. 심지어 완성형 차도남 캐릭터의 궁극의 비기, ‘가슴의 상처 하나쯤’도 갖고 있다. 원인 불명이긴 하지만 어쨌든 트라우마가 있고 그 탓에 고소공포증에 시달린다. 폐소공포증의 김주원, 고장난 심장의 독고진 등은 사실 리처드 기어의 변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으로 직업. 나쁜 말로는 ‘기업사냥꾼’, 좋은 말로는 기업 인수합병 전문가 되시겠다. 기업사냥꾼의 세계에선 전문 분야가 제각각이지만, 그중에서도 리처드 기어의 필살기는 인수합병을 통해 생기는 기업매매차익 취득이다. 초기 자본금만 있으면 어렵지 않다. 경영난에 시달리는 기업 하나 인수해서 몇몇 부서들 쳐내고 가급적 퇴직금 없이 직원들 해고한 뒤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시장가치가 올라가면 비싼 값으로 되팔면 된다. 인수합병 시즌2, 시즌3…. 이상은 우리 시대 ‘백마 탄 왕자님’의 비즈니스 라이프였다.
물론 이런 사람이 왕자님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레이거노믹스, 신자유주의 등등의 시대적 상황이 있었다. 월가의 황소 고삐가 풀리면서부터는(금융 탈규제) 좋은 물건 만들어 많이 팔아 돈 버는 기업 관행은 구식이 돼버렸다. 그 대신 오늘날의 상층 자본가 계급처럼 남의 주머니 털어낸 다음 자기 주머니 불리는 게 각광받는 경제활동이 되었다.
사람들이 <귀여운 여인>에서 보지 못했던 내러티브가 바로 이것이었다. 순수한 멜로극인 줄 알았겠지만 이쯤 되면 월스트리트 비즈니스맨의 엘에이(LA) 선박회사 인수합병 드라마로도 봐줄 만하지 않나 싶다. 이참에 영화 제목도 <차가운 도시 남자>면 안성맞춤이겠다.
그래도 1980년대까지 기업사냥꾼에게 양심은 있었나 보다. 언제나 고독했던 그가 비로소 치유를 얻기 시작한 건 줄리아 로버츠와 마음을 터놓고 생애사를 주고받으면서부터였다. 이 장면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리처드 기어의 깊은 눈이다. 그의 눈은 그녀에게 말하는 듯하다. ‘너도 나와 같구나.’
물론 사랑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 상처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을 알았을 때 느끼게 되는 안도감과 연대감 없이는 불가능한 사랑이다. 그리고 거리에서 성매매를 하는 너와 기업을 사냥하는 내가 다르지 않구나, 적어도 내가 더 못났구나 하는 자기 확인 없이는 불가능한 사랑이다. 아버지의 회사를 사냥하면서 증오를 풀어버리려 했던 나 말이다.
이제 리처드 기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기업사냥 따위 포기하고 닥치고 돌진, 백마를 타고 달려 마법의 탑에 갇힌 그녀를 구출하는 길뿐이다. 그런데 웬걸. 탑을 오르다 보니 깨닫게 된다. 고소공포증이 사라졌다! 물론 대개의 영화들이란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결말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문화사회연구소연구원 김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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