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민용근
영화 ‘타임 투 리브’
민용근의 디렉터스컷
며칠 전 어느 60대 노부부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경찰에 따르면 극심한 생활고와 외로움으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했다. 한 사람당 7만5000원씩 나오는 15만원의 노령연금이 노부부의 유일한 수입원이었고, 통장에 남아 있던 잔고는 3000원이 전부였다고 한다. 오랫동안 외부 출입도 하지 않았고, 이웃과의 교류도 없었으며, 유일한 혈육인 아들조차 전화로 연락해온 경찰에게 ‘지금 찾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만 남겼을 정도로 오랫동안 왕래가 없었다고 한다. 장례비로 쓰라고 남겨놓은 듯한 5만원권 열 장과, 의과대학에 약속했던 신체 기증을 위해 시신이 빨리 발견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것이 노부부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몸짓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향해 그토록 억척같이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기사를 읽으며 또 한 번 마음이 무너진 건, 노부부가 남긴 유서의 첫 문장 때문이었다. 또박또박 쓴 그 글자들 속엔 뜨거운 절규 대신, 차가운 회한과 체념만이 새겨져 있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토록 차갑게 체념할 수밖에 없었던 그 절망의 깊이를, 나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 <타임 투 리브>(2005)에는 말기 암 진단을 받은 젊고 유능한 사진작가 로맹이 등장한다. 생의 가장 화려한 한가운데에서 갑작스레 시한부 진단을 받은 그는 치료를 거부한 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의 마지막을 맞는다. 자신의 병을 비밀로 한 채, 가족을 향해 상처 되는 말을 내뱉고, 동성 애인에게 냉정한 이별을 고한 그는 관성적으로 맺어진 인간관계를 끊어버리고, 홀로 죽음을 감내해내려 한다. 로맹이 유일하게 자신의 병을 고백하는 이는 나이 많은 그의 할머니였는데, 왜 자신에게만 ‘시한부’ 사실을 고백하냐고 묻는 할머니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저랑 같잖아요. 할머니도 곧 돌아가실 테니까요.” 비정한 말처럼 들리지만 어쩌면 죽음을 앞에 둔 로맹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하고 애정 어린 말이기도 하다.
로맹은 죽음의 순간이 가까워질수록 불안과 혼란의 감정을 자신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또한 관계를 정리하고 자신을 홀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한다. 결국 시한부 인생이 가져다 준 ‘체념’ 앞에서 로맹은 비로소 삶에 대한 혜안을 하나둘 얻어 나가게 된 것이다.
죽음의 이유가 다르기에, 노부부의 선택과 로맹의 마지막 삶을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로맹이 삶의 마지막 순간 깨닫게 되는 혜안과, 노부부가 죽음을 앞에 두고 쓴 유서의 첫 문장은 묘하게 닮았다.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향해 그토록 억척같이 살아왔는지 모르겠다”는 문장은 체념의 말일 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날카로운 혜안이 담긴 말이기도 하다. 안타까운 것은 체념의 끝에서 길어올린 그 혜안이 삶으로 승화되지 못한 채 죽음으로 연결되었다는 데에 있다. 물론 노부부가 견뎌왔을 고된 현실과 그들을 방기한 부실한 사회 시스템을 가볍게 여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체념을 죽음으로 연결시킬 수밖에 없던 그 선택이 안타깝고 가슴 아픈 것이다.
‘체념’이라는 단어의 본디 뜻은 ‘이치나 도리를 깨닫는 마음’이라고 한다. 곧 이치와 도리를 깨닫고 마음을 비워 평안을 찾는다는 의미도 품고 있는 것이다. 체념은 끝이 아니다. 체념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것도 있는 것이다.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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