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써니>는 그동안 하위문화가 외면해온 ‘소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토요판] 김성윤의 덕후감
그동안 10대 하위문화를 소재로 한 영화는 대부분 소년들의 것이었다. 1970년대를 다룬 <말죽거리 잔혹사>, 1980년대를 다룬 <품행제로> 등이 대표적이다. 이 영화들은 <고교 얄개>처럼 당시 학창 시절을 어떤 순수형으로 제시했던 게 아니라, 날라리의 시선으로, 그것도 ‘개날라리’의 시선으로 재구성했다. 그들은 일탈과 탈주의 간극 속에서 어른들의 시대정신‘들’로는 포착되지 않는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한 하위문화 속에서도 소녀들의 이야기는 종종 은폐되어 왔다. <품행제로>에서처럼 소녀들이 박혜성과 김승진 노래로 신경전을 벌이더라도, 그녀들의 하위문화는 전체 구조에서는 소년 하위문화의 부속품으로서만 등장할 뿐이었다. <써니>가 반가웠던 것은 우리들의 지난 시절을 그저 웃으며 담담히 회고할 수 있어서가 아니었다. 나미(유호정·심은경)와 춘화(진희경·강소라)를 중심으로 하는 전설의 ‘칠공주’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영화는 감독 자신이 어머니의 학창 시절 사진을 보며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사진 속 그녀는 지금과 달리 오로지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집중했던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 꿈 많던 10대 소녀는 영화 속 나미의 현재 모습처럼, 남편과 자식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대리 충족해야만 하는 우리 시대의 ‘어머니’가 되어 있다. 영화는 묻는다. 진짜로, 그녀는 어디 있는 것일까.
각자 삶의 주인공이었던 그녀들은 학교마다 활개치곤 했던 여느 칠공주들이었다. 남자들만 생존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겠다는 춘화, 쌍꺼풀 수술로 미녀가 되고자 하는 장미, 입에 욕을 달고 사는 진희, 작가를 지망하는 천생 문학소녀 금옥, 사랑받기 위해 미스코리아가 되고자 하는 복희, 어두운 가정사 때문에 언제나 우울하지만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수지, 자신의 이름을 딴 만화 캐릭터 ‘영심이’처럼 꿈 많은 나미. 춘화가 보내준 영상을 보면서 나미가 눈물을 흘리고, 그녀의 시선으로써 관객들도 눈시울을 적셨던 것은 바로 ‘내’가 욕망하는 주체(였)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는 대개의 상업영화가 그렇듯 그럴싸하게 문제를 제기하고는 얼른 주워담기 바쁘다. ‘여성의 욕망’이란 문제 설정에는 언제나 논란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실제로 10대 시절의 그 욕망조차도 순수 형태라기보다는 당대에 활개치기 시작하던 소비자본주의에 의해 전도된 결과일 뿐이다. 물론 이 사회 속에서 그 여자의 욕망은 그 남자의 욕망에 비해 이중 삼중으로 전도될 수밖에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사실 이 문제를 <써니>가 해소해주기 바라는 건 과한 욕심일 것이다.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위문화적 욕망과 현재적 비참의 간극을 해소하기 위해 영화가 돈 잔치로 마무리된다는 점이다. 사업에 성공했던 춘화는 친구들에게 못다 춘 ‘써니’ 춤을 추는 대가로 ‘유산’을 물려준다. 나미에게는 리더 자리를 물려줘 삶의 활력을, 복희에게는 아파트와 가게를, 장미에게는 막대한 보험 계약을, 금옥에게는 출판사 인턴십과 경영권을, 관객에게는 진희한테 아무것도 주지 않음으로써 웃음을. 춘화가 고등학교 중퇴 학력으로 사업에 성공했다는 건 다소 뜬금없는 내러티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개연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춘화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리더십뿐만 아니라 온갖 사업 아이디어가 넘치던 친구였으니 말이다.
노동운동 하던 나미의 친오빠마저 외국인 노동자 임금을 체불하는 사업주가 된 마당에, 감독이 찾은 탈출구는 이 정도였다. 그런데 욕망이 해방되면 주체는 정말로 자유로워지는 걸까. 아무래도 이 영화의 감독은 그리 생각했던 것 같다.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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