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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노감독 우디 앨런이 차린 ‘따뜻한 밥상’

등록 2012-07-22 20:11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김영진의 시네마즉설
‘미드나잇 인 파리’

우디 앨런의 영화는 한국에서 그다지 인기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의 전성기라고 흔히 평가받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그의 영화는 한국에 수입된 적이 없다. 영화 마니아들 사이의 인기를 업고 뒤늦게 개봉했던 1990년대 이후의 몇몇 영화들도 관객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대사 유머감각이 상당한 그의 영화의 매력이 온전히 번역되기 힘든 탓도 있었다. 지난해 프랑스 칸영화제 개막작이었던 우디 앨런의 근작 <미드나잇 인 파리>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소규모 개봉인데도 관객 반응이 비교적 좋다.

혹자는 우디 앨런이 2000년대에 만든 영화들의 수준이 과거에 비해 좀 떨어진다고 하지만 난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40여년 동안 쉬지 않고 평균 일년에 한 편씩 꾸준히 영화를 만든 노감독의 허허실실 편안한 호흡이 느껴진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주인공을 감독이 묘사하는 방식을 보면 그 단순명료함에 놀라게 된다. 별다른 시간 경계 구분도 없다. 그냥 파리 밤거리에 나타난 구식 푸조 승용차에 주인공이 올라타면 그의 눈앞에 1920년대의 파리가 펼쳐지는 것이다.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로서 소설가로 전업하려는 주인공 ‘길’은 그곳에서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파블로 피카소 등을 만나고 피카소와 모딜리아니의 연인인 가상의 인물 애드리아나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심지어 주인공 길이 과거의 애드리아나가 남긴 일기를 현재의 노상 서점에서 발견해 거기 자신에 대한 연모의 감정이 적혀 있는 걸 알게 되는 장면까지 있다. 시간을 점프한 여행은 1920년대에서 19세기 말로 한 번 이동하기도 한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기가 막힌 것은 과거로의 환상 장면에서 제시된 처방으로 현실을 고친다는 설정이다. 일례로, 길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멘토였던 거트루드 스타인 여사가 자신에게 해준 논평에 감화받아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을 좋은 방향으로 고친다. 물론, 현실의 결핍을 메워주는 환상의 약발이 오래가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 길은 사랑에 빠진 1920년대의 애드리아나가 19세기 말의 파리를 그리워하는 걸 보고 깨닫는다. 현재는 늘 불우하며 결핍돼 있고 과거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윤색돼 있다. 그렇다고 현실에서 마술적 경험이 일어나는 건 불가능한가? 그렇지 않다고 이 영화는 말해준다. 천재 예술가들의 열정을 곁에서 구경한 것만으로도 감읍할 지경인데, 주인공 길은 다시 돌아온 현실에서 속물 약혼자 가족과 이별하고 자신만의 삶을 고독하게 꾸리려는 찰나에 안면이 있던 매력적인 파리의 아가씨와 재회해 비 오는 파리 밤거리를 함께 걸어간다. 이건 관객에게 우디 앨런이 주는 영화적 환상의 보너스다.

대중영화든, 예술영화든 요즘 대다수 영화들은 시청각적 정보가 너무 많아서 보고 있으면 피곤할 때가 적지 않다. ‘이래도 위로를 받지 않을래요? 찬탄하지 않을래요? 성찰하지 않을래요?’라고 웅변하는 듯한 영화가 너무 많다. 우디 앨런의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만드는 이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보는 이는 편안하게 볼 수 있게끔, 가볍게 몸 풀듯이 감독을 비롯한 배우·스태프들이 영화를 즐기면서 만들었다는 착각을 준다. 따뜻한 밥 한 공기가 줄 수 있는 포만감과 비슷한 만족감을 준다. 극장에서 큰 스크린으로 한번 보시길 권한다.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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