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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이주민 역사’ 발라내고 맛보는 치유

등록 2012-07-27 19:53

<하와이언 레시피>(2008)
<하와이언 레시피>(2008)
[토요판] 김성윤의 덕후감
어쩌면 요즘 우리는 ‘하와이’와 같은 어떤 색다른 장소를 집합적으로 소망하고 있는 모양이다. 올해만 해도 하와이에 관한 영화가 두 편이나 개봉됐다. 하나는 지난 2월에 개봉됐던 <디센던트>(2011)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 상영중이자 오늘 이야기할 <하와이언 레시피>(2008·사진)다.

<하와이언 레시피>는 일본의 한 대학생이 ‘달무지개’를 보기 위해 하와이의 호노카아라는 마을을 찾으면서 시작한다. 영화는 전형적인 ‘힐링 무비’다. 즉, 삶의 동기(motivation)를 잃었던 청년이 작은 마을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영혼이 정화된다는 다소 빤한 이야기.

그래도 제법 아기자기한 면이 있다. 주인공 레오는 마을 극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내는데 그가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은 귀엽기 그지없다. 늘상 졸음에 겨운 팝콘 할아버지, 페넬로페 크루스 사진에 ‘하앍’대는 할아버지, 1950년대 스타일을 최고로 아는 미용사 할머니, 그리고 레오에게 날마다 마법 같은 요리를 해주는 괴짜 할머니.

물론 이러저러한 긴장감을 제외한다면, 이 영화는 힐링 무비로서의 상투성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활력 상실의 인생, 이국적인 장소의 방문, 시간이 멈춘 듯한 경험, 소박한 사람들과의 교류 등등. 심지어 달무지개라는 미지의 환상도 덧없음이 드러난다. 오히려 달무지개는 괴짜 할머니 ‘비’가 실명하면서 흐릿한 시야를 통해 보게 된다. 그렇다, 힐링의 진정한 열쇠는 인간 내면의 성숙함에서 찾아진다는 내러티브 되겠다.

내면으로의 침잠…. 단순소박한 이 영화는 그 어떤 역사성에도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호노카아라는 마을에서 레오가 만나는 사람들은 죄다 일본계 이주민 혹은 그 2세나 3세다. 그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일본인의 이주 노동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주인공이 이곳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감각을 누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 때문이었고.

그런데도 영화는 그 모든 리얼리티를 비켜나간다. 특히 레오가 일하는 극장의 이름이 ‘인민 극장’이란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왜냐면 이 마을의 역사성은 이주 노동자들의 생활세계가 투영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인데, 정작 영화는 주민들의 정체성에서 ‘이주 노동’이란 의미를 지워버리고 현대 일본에선 찾기 힘든 ‘슬로 라이프’를 사는 존재로만 그리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현지인들의 삶은 그저 여행객의 추상적 시선으로만 포착된다. 이 영화는 호노카아의 생활세계를 사진으로 찍고 블로그에 올리며 자랑질하는 철없는 20대 일본 여성들에게 조소를 보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민들과 어울려 살며 내면의 치유를 얻게 되는 주인공 레오도 질적으로 크게 다른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레오 역시도 그네들에게서 과거의 역사를, 그리고 그네들을 통해서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역사를 대면한 적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물론 모든 영화가 다큐멘터리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게 역사의식을 누락시킬 알리바이가 될 수도 없다. 그런 맥락에서 <하와이언 레시피>를 보면 현지인들의 삶을 ‘착취’한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영화는 이주 노동이라는 ‘산 역사’를 일종의 ‘죽은 역사’로 만들고 그것을 자원으로 삼아 “가와이~”(귀여워~)를 연발하면서 쾌락을 향유하는 영화가 아닌가.

질문 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호노카아 보이>라는 원제는 왜 하필 <하와이언 레시피>라는 제목으로 번안된 걸까. 심지어 모처의 극장에서는 관객과의 만남, 곧 지브이(GV·Guest Visit)에 이탈리안 레스토랑 셰프가 초대됐다고 하니, 이 정도면 ‘헐~’ 소리가 절로 나온다. 역사를 삭제한 치유란 대체 어인 연고로 나타난 현상일까. 심지어 그 치유마저도 어쩌다 중고가의 맛난 요리로 둔갑한 걸까. 어쨌든 영화는 관객에게 속삭인다. ‘요즘 힘들지? 그렇지만 너만의 달무지개가 있는 내면으로 침잠하면 분명 치유를 받을 수 있을 거야. 아니면 맛있는 걸 먹든가.’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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