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하굣길에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자기는 6학년이라고 했다.
“니, 김종수 알재?” “예. 압니더.” 종수는 우리 학년의 ‘일진’이었다.
“종수가 내 동생이다. 작년에 내 동생이 주는 우표 받았재?” 기억나지 않았다. 우표를 받았을 리도 없었다. 취미 삼아 우표 수집하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나는 관심 없었다.
“그 우표가 사실 내 꺼거든. 종수가 내 몰래 지 친구들한테 줬다 아이가. 내가 우표 받으러 왔다. 내일까지 가지고 온나.” 위협적인 목소리에 내 눈이 동그래졌다. 종수 형은 그제야 의도를 드러냈다.
“우표가 없으믄 대신 천 원을 가지고 와도 되고.” 우표 받은 일이 없다 하고 돌아서면 될 것을, 내 입에서 알겠다는 답이 나오고 말았다.
다음날부터 나는 채무자가 되었다. 수업을 마치고 나가다 정문에 서 있는 종수 형을 보고 돌아섰다. 어둑해질 때까지 운동장 구석에 숨어 있었다. 어떤 날은 학교 담을 넘어 도망갔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 일도 아니지만 11살 소년에게는 출구가 없었다. 무섭고 외로웠다. 밤마다 채권자의 그림자가 나를 괴롭혔다.
며칠 뒤 결국 종수 형과 마주쳤다. 그는 씨익 웃으며 다가왔고 나는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몇 백 미터를 달렸을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것은 숨이 차서 그런 것보다는 알 수 없는 공포가 나를 쫓아왔기 때문이었다.
미국 머리 카운티의 고등학생 타일러 역시 자신이 당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친구들은 무리를 지어 그에게 욕을 하고 협박했다. 물건을 집어던지고 때렸다. 함께 있을 때 두려울 게 없었던 친구들의 폭행은 습관이 되었다. 타일러에게는 매 순간이 지옥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타일러가 겪는 고통의 깊이는 누구도 몰랐다. 한창 클 때는 누구나 그렇다는 게 교사와 부모의 생각이었다. 그는 극단적인 방법을 찾았다. 자기 방 벽장에 벨트를 묶고 목을 걸었다. 타일러가 자살한 다음날 친구들은 목에 밧줄을 걸고 장난을 치며 등교했다.
다큐멘터리 <불리>(Bully·사진)는 학교폭력이 타일러 같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투영되는지를 관찰한다. ‘불리’는 집단괴롭힘을 뜻하는 단어지만 다큐는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주목한다. 감독은 1년 동안 5개 주, 5명의 아이들을 취재했다. 어떤 아이는 조금 다른 생김새 때문에, 다른 아이는 남다른 감수성 때문에 괴롭힘을 당했다. 끝까지 이유를 모르는 아이도 있었다. 5명 중 2명이 자살을 선택했다.
폭력은 학습되고 닮은꼴을 띤다. 단순하다. 그러나 폭력에 당하는 아이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상처를 안고 웅크린다. 모든 고통은 저마다 다른 색깔과 깊이를 가진다. 맞서 싸우라는 말은 그 작은 세계를 무시한 독선적인 매뉴얼일 뿐이다. 그래서 다큐는 폭력에 쓰러진 아이들 하나하나에 주목할 것을 권한다.
<불리>는 미국 다큐지만 한국 사회의 표정을 닮았다. 그래서 불편하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좋은 다큐멘터리가 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다. 오늘부터 8일 동안 <교육방송>(EBS) 국제다큐영화제가 열린다. <불리>는 개막작이다.
김형준 교육방송 다큐멘터리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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