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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어글리 1초, 러블리 1초

등록 2012-08-17 19:43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할 수 없는 짓을 해보는 게 영화다. 갈 수 없는 곳에 가보는 게 영화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돌이키는 게 영화이며, 납득할 수 없는 것을 납득시키는 것 또한 영화다. 그래서 영화는 종종, 아니 자주, 시간 여행을 떠난다. 할 수 없는 짓을 해보는 최선의 방법으로, 갈 수 없는 곳에 가보는 유일한 수단으로, ‘시간을 달리는 소녀’들과 ‘시간 여행자의 아내’들이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슴에 묻고 사는 동안,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오늘도 ‘거꾸로 간다’ 이거다.

스테판의 시간도 그래서 거꾸로 간다. 처음부터 시간이 거꾸로 가진 않았다. 그녀를 만나고 나서부터 종종 거꾸로 간다. 아니 왜? ‘그녀’가 누군데? 어떻게 만난 건데?

자, 얘기는 이렇다. 아빠는 멕시코 사람, 엄마는 프랑스 사람. 멕시코에서 잘 살고 있는 스테판에게 엄마가 말씀하셨다. “파리에 가면 분명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거야.” 젠장, 와보니까 별거 없다. 아프니까 청춘이란다. 분명 예술가의 삶을 주문했는데 막상 포장을 뜯어보니 그에게 배달된 인생은 그냥 회사원.

그러던 어느 날, 옆집에 ‘그녀’가 이사 온다. 이름은 스테파니. 다 아름답지만 특히 피아노 치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스테판은 자신을 발명가라고 소개했다. 이제 스테파니의 마음을 사로잡을 기발한 발명품만 있으면 된다. 그래서 만들었다. 1초 타임머신.

일단 생김새는 오래된 게임기를 닮았다. ‘과거’ 기능을 선택하고 버튼을 누르면 딱 1초만큼 시간이 거꾸로 간다나? 속는 셈 치고 스테파니가 버튼을 누르면, 스테판이 움찔! 또 한 번 버튼을 누르면 꿈틀! 다시 주어진 1초의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아시다시피 고작 ‘움찔’과 ‘꿈틀’의 몸부림뿐이다.

이번엔 ‘미래’ 기능 선택하고 버튼을 누른다. 그러자 와락, 와락. 두 번 연속 스테파니를 껴안는 스테판. “뭐야, 왜 두 번씩이나 안고 그래?” “한 번은 미래고, 한 번은 현재니깐.” 야… 이건 뭐… 이 자식, 천잰데?

그러니까, 인류 역사상 가장 쩨쩨한 시간 여행을 선물하는 ‘1초 타임머신’은 결국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시도하기 위한 스테판의 꼼수였다. 이 유치한 장난질을 스테판은 제법 근사한 멘트로 포장할 줄 안다. “겨우 1초로 뭘 해?” 여자가 물었을 때, 희미한 미소를 흘리며 이렇게 대답하는 센스. “그냥. 우리의 값진 삶에 1초를 더하면 좋잖아.”

‘움찔’의 에스에프(SF), ‘와락’의 로맨스. 미셸 공드리 감독이 연출한 2005년 작품 <수면의 과학>.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발명품 중에서 관객을 특히 즐겁게 만든 ‘1초 타임머신’이 드디어 상용화되었다. 다시 주어진 1초 동안 겨우 움찔하거나 꿈틀하는 것밖에 할 수 없던 베타버전의 ‘버그’도 완벽하게 수정했다.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무한정 시간을 되돌려 기어코 미래를 바꾸는 기적의 1초 타임머신. 일단 펜싱 경기장에서 시범 운용되고 있다는 걸 온 국민이 확인할 수 있었다.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돌이키는 게 영화이며, 납득할 수 없는 것을 납득시키는 것 또한 영화다. 그래서 영화는 종종, 아니 자주, 시간 여행을 떠난다. 그래, 아무래도 그건 영화가 할 일이다. 청춘의 값진 삶에 1초를 더하는 스테판의 꼼수는 ‘러블리’ 하지만, 다 끝난 경기에 자꾸 1초를 더하는 무리수는 그저 ‘어글리’ 했으므로.

신아람 선수에게 <수면의 과학>을 권한다 “전 도대체 그 1초라는 시간이 그렇게 긴 줄 몰랐어요.” 그 울분의 멘트가 영화를 보고 나면 분명 이렇게 바뀔 것이다. “전 도대체 그 1초라는 시간이 그렇게 사랑스러운 줄 몰랐어요.”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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