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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100걸음의 감옥’ 대 ‘목욕탕 열쇠고리’

등록 2012-08-31 19:58

영화 <디스터비아>(2007)
영화 <디스터비아>(2007)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아버지는 큰맘 먹고 아들에게 운전을 맡겼다. 그게 문제였다. 큰맘 먹지 말고 밥이나 먹을 걸 그랬다. 아들이 성급하게 끼어들려다 갓길에 세워둔 차를 발견하지 못해서 쾅! 뒤집힌 채로 도로 한가운데 누워 있는 차의 옆구리를 뒤따라오던 차가 또다시 쾅! 아버지가 앉아 있던 조수석이 형편없이 찌그러졌다. 아들은 살고 아버지는 죽었다.

1년 후. 관객이 아들을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선생님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느그 아버지가 어쩌고저쩌고… 너같이 얼빠진 놈을 자식이라고 두었으니 이러쿵저러쿵… 깐족대는 교사를 내 손으로 ‘맴매’하겠어요! 아버지의 이름으로 ‘때찌’하였어요! 그러자 교권이 무너지네 어쩌네 기자들 붙들고 호들갑 떠는 대신 쿨하게 제자를 곧장 법정으로 데려간 선생님은 진정 아메리칸 스톼일~! 판사는 다혈질 학생의 섣부른 강펀치에 유죄를 선고하되, ‘애비 없는 자식’의 정상을 몹시 참작하여 가택연금 90일만 명령한다. 그리고… 전자발찌를 채운다.

내 방에서 100걸음. 반경 30m를 벗어나선 안 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101번째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삐삐삐삐…. 요란한 경고음이 울리더니 정말 득달같이 경찰차가 출동하는 거다. 허거걱! 다시는 집 밖으로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주인공. 그래, 전자발찌란 무릇 그래야 하는 것 아니겠니?

자, 여기는 한국. 전자발찌 찬 성범죄 전과자가, 아이를 유치원 승합차에 태워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여성을 성폭행하려다 실패하자 흉기로 마구 찔러 숨지게 한 나라. 경찰이 즉각 “전자발찌를 착용해도 현행 법규상 이동하는 데 제한이 있거나 보호관찰소에서 24시간 위치를 추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범죄 예방에 한계가 있다”고 쉴드치며 서둘러 책임을 회피하였더랬던 우리들의 조국. 결국 피해자 남편이 울분을 토하며 이렇게 소리치게 만든 참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그 악마의 전자발찌는 발목에 찬 목욕탕 열쇠고리에 불과했습니다!”

영화 <디스터비아>(2007)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이창>(1954)을 창의적으로 리메이크한 스릴러다.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 주인공이 살인범으로 의심되는 이웃집 남자를 요리 보고 조리 보고 몰래 보고 훔쳐보는 이야기의 얼개는 같다. 대신 <이창>의 어른 주인공이 <디스터비아>에선 10대 청소년으로 바뀌었고, 다리가 부러져 깁스하는 통에 집 밖으로 쉽게 나갈 수 없던 주인공의 처지가 전자발찌를 차는 통에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처지로 바뀌었다.

<이창>에서 볼 수 없던 <디스터비아>의 신선한 긴장감이 바로 이 전자발찌에서 나온다. 반경 30m에서 단 1m만 벗어나도 즉각 경찰이 출동하는 불편한 진실, 그래서 이웃집 남자가 범인이라는 심증이 있어도 직접 물증을 확보하러 다니는 게 쉽지 않은 현실, 전자발찌를 떼어내려고도 해봤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그걸 자르거나 끊어낼 수 없다는 사실 덕분에 상영시간 내내 긴박할 수밖에. “목욕탕 열쇠고리에 불과한” 전자발찌 달랑 채워놓고 그걸 착용해도 “현행 법규상 이동하는 데 제한이 있거나 보호관찰소에서 24시간 위치를 추적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곳의 국민은, 주인공의 정의로운 행동을 방해하는 전자발찌조차 마냥 부러운 눈으로 볼 수밖에.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다행히 <디스터비아>의 주인공은 친구들 도움으로 사건을 해결한다. 교권침해의 아이콘께서 하루아침에 용감한 시민으로 돌변한 정상을 또 몹시 참작하여 가택연금이 당장 해제된다. 그때 경찰이 하는 말. “좋은 일 해서 이 장치를 빨리 뗀 건 니가 처음이다.” 언젠가 우리나라에도 이런 말 듣게 될 사람이 나올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인간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찾아가서 등 토닥이며 이런 말도 해주지. 전자발찌 부착 명령이 내려진 성범죄자 가운데 현재 정부가 그 행적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 9명이라지, 아마?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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