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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나도 저런 왕, 아니 저런 대통령 갖고 싶다”

등록 2012-10-05 19:46수정 2012-10-06 11:22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허미경의 TV남녀 ‘가짜 광해’에 박수치는 이유
역사학자 노명호씨의 책 <고려 국가와 집단의식>을 보면 고려인들의 세계 인식과 관련해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고려 정치사를 다원적 천하론과 일원적 천하론의 대결로 읽는 시각이다. 하늘이 하나라고 믿는 자들과 여럿이라 믿는 자들의 역관계가 고려 정치사를 규정했다는 뜻이다. 태조 왕건을 비롯한 고려 초기 전통적 지배층이 다원적 천하론을 옹호했다면,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12세기에 일원적 천하론을 폈다. 김부식은 당·송 등 한족의 국가만이 중화이며 고려는 오랑캐(夷)로 보았다. 왕건은 천하의 중심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중심을 갖는 몇개의 소천하들이 병존하다고 생각했다.

다원론자들은 대외관계에서는 실제 세력관계와 실리를 중시했다. 강대국에 대한 형식적 사대를 받아들이되 국익을 지키는 데는 강온 양면책을 구사했다.

그 뒤 들어선 조선에서는 사실상 오래도록 일원론자들이 득세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15대 왕 광해군의 경우 조선 왕 가운데 몇 안 되는 다원적 천하론자가 아니었을까. 당대뿐 아니라 조선 역사를 통틀어도 소수파였던 셈이다.

기대감이 커서였는지 모르지만,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사진)를 보고, 솔직히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배우들의 연기는 나무랄 데 없었다. 1인2역을 한 이병헌은 물론이고 가짜 왕 하선에게 진짜 정치를 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게 하는 어린 궁녀 사월이(심은경)까지. 영화는 <승정원 일기>에서 광해군 시절 15일간의 기록이 비어 있다는 설정을 내세워 그 보름 동안 다른 이가 광해 노릇을 했으며 그 ‘대체 왕’이 대동법을 시행하고 실리 외교를 펼쳤다는 이야기다.

역사의 틈새를 파고드는 그럴 법한 상상력이긴 한데, 왠지 내게는 역사 속 인물 광해와 정면 대결하기보다는 역사를 우회하여 소극(笑劇)화한다는 느낌이었다. 광해를 정치적 궁지로 몰아넣는 서인들은 논리도 없이 그저 제 이익만을 취하는 탐관오리들로 그려진다. 안방 사극 <뿌리깊은 나무>가 세종이라는 군주의 욕망을 들여다볼 뿐 아니라 한 나라에 문자가 생겨난다는 것, 문자를 갖는다는 것이 곧 권력을 갖는다는 것임을 당대에 대한 현실감 있는 묘사로 드러냈다면, <광해…>는 ‘대체 이야기’를 영화의 극성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채택했다는 혐의를 지우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 영화가 많은 관객의 마음을 얻고 있다. 개봉 3주 만에 730만을 넘어섰다. <광해…>의 메시지는 명쾌하다. 어쩌면 그 간단명료함에 흥행의 비결이 있는지도 모른다. <광해…>는 저잣거리 ‘민초’ 하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누리꾼들의 영화 댓글을 엿보면, 이 하선의 마음에서 진짜 왕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영화의 절정에서, 마지못해 왕 대역을 하던 하선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왕이 되고 싶소이다.”

상반된 천하론의 대결은 오늘날도 엇비슷하다. 미국 일원론과 다원적 실리 외교론이 맞부딪는 형국이다.

대선을 앞둔 이 계절에 사람들은 왜 이 ‘가짜 왕’의 이야기에 호응하는가. 하선은 대동법 시행을 반대하는 관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땅 열마지기 가진 이에게 쌀 열 섬을 받고, 한 마지기 가진 이에게 쌀 한 섬 받겠다는데 그게 차별이요?” 오랑캐(금나라)에 짓밟히는 한이 있어도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 예를 다해야 한다는 신하의 말에는 이렇게 웅변한다. “그대들이 죽고 못사는 사대의 예보다, 내 백성이 열갑절 백갑절은 더 소중하오.” 나도 저런 왕, 아니 저런 대통령을 갖고 싶다. 아마도, 이런 마음이 아닐까.

허미경 대중문화팀장 carm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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