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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사랑은 고독한 이웃집의 벽을 타고 온다

등록 2012-10-19 19:48수정 2012-10-19 21:33

영화 <용의자X>
영화 <용의자X>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낯선 남자의 고함이 들리고 이내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때리는 소리, 맞는 소리, 깨지는 소리, 무너지는 소리, 한 여자의 인생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소리, 우당탕탕, 쿵쿵. 그리고 불길한 침묵. 결국 남자가 벨을 누른다. 옆집 여자가 빼꼼히 문을 연다. “저기요,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요….” 그렇게 시작된 옆집 남자, 옆집 여자의 특별한 인연. 영화 <용의자X>의 도입부다.

이 작품의 원작은 일본 소설 <용의자X의 헌신>이다. 원작에서도 배경은 아파트다. 같은 층에 나란히 붙어 있는 두 집,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나누는 옆집 대화도 제법 선명하게 들려오는 낡고 작은 아파트에 그들이 산다. 덕분에 그는 그녀의 슬픔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일본에 좀 살아본 분들은, 그 나라에서는 누구나 용의자X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콘크리트가 대세인 요즘에도 여전히 목조건물을 많이 짓는 주거 문화 때문이다. 최신 고급 맨션이 아닌 이상 웬만한 아파트에선 방음이 잘될 리 없다. 아무리 셀프 방음에 매진하는 게 일본인들이라 해도, 인터넷을 조금만 찾아보면 유학생들의 생생한 증언이 쏟아진다. “옆집 아저씨 코고는 소리가 어찌나 크게 들리는지, 두 사람이 자고 있는 방인데 마치 세 사람이 자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옆집 남녀가 어찌나 혈기 왕성한지 그 집 침대가 우리 집 벽을 뚫고 나올 기세였다니까요.”

일본 목조건물 문화가 낳은 변종 추리극이자 도시형 ‘옆집 소음 멜로’의 걸작 <용의자X의 헌신>이 지금, 한국에서 리메이크된 것에 주목한다. 그렇게 ‘공구리’를 쳐대는데도 여전히 남의 집 소리가 참 잘 들리는 한국 아파트의 층간 소음, 옆집 소음 문제가 감독을 부추긴 건 물론 아닐 것이다. 오히려 옆집 소리는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는 우리 삶의 태도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굳이 한국판을 또 만든 건 아닌지 혼자 추측해본다. 조작된 알리바이의 진실을 밝히는 데 큰 힘을 쏟는 일본판 영화와 달리, 한국판 <용의자X>는 이웃한 두 사람의 ‘관심’이 서서히 ‘관계’로 무르익는 과정에 더 집중하고 있는 것도 이 괜한 추측을 사실로 믿고 싶게 만든다.

얼마 전 한 언론이 ‘혼자 죽음을 맞이하고 사후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발견되는’ 이른바 ‘고독사’ 문제를 취재한 적이 있다. 일본에서는 10년 전부터 사회문제로 대두되었고, 우리가 지금 일본이 간 길을 그대로 뒤따라가고 있지만 아직 국내에서는 관련 통계도 작성되고 있지 않다는 대목을 기억한다. 자칫 ‘고독사’ 할 뻔한 주인공이 똑똑, 자신의 삶에 처음 노크해준 이웃집 여자를 위해 ‘헌신’하는 이야기 <용의자X의 헌신>이 일본에서 출간된 것이 2006년. 2012년의 대한민국도 이제는 옆집 소음에 짜증만 낼 일이 아니라 그나마 소음이 있다는 사실에서, 누군가 살아있다는 사실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해야만 하는 서글픈 시대를 살게 되는 걸까?

스웨덴 영화 <렛 미 인>에서 오스카르가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옆집 소녀 엘리에게 모스 부호를 보낸다. 손가락으로 벽을 두드려 소녀에게 건넨 첫번째 인사. “잘 자”. <아이 오브 더 비홀더>에서 지친 삶을 욕조에 누이고 쉬는 애슐리 저드의 편안한 호흡을, 벽 너머에서 가만히 듣고 있는 유언 맥그리거. 그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여자를 오래도록 기억할, 그녀 삶의 유일한 목격자가 된다.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어느 나라에나 아파트는 있다. 누군가 살아있다는 증거, 각자의 소란스러운 우주가 부딪히는 그곳에서 드라마는 시작된다. 우당탕탕, 쿵쿵. 그리고 불길한 침묵. 그것을 ‘소음’이 아니라 ‘소리’라고 인식할 때, 내 이웃의 삶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소리를 외면하지 않을 때, 그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극적인 형태의 기적을 상상하는 ‘옆집 소음 멜로 영화’들. 사랑은 비를 타고 오지 않는다. 벽을 타고 온다. 영화에선… 그렇다.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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