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진 기자
울림과 스밈
육상 100m에선 선수들이 뛰는 방향으로 초속 2m 이상의 바람이 불면 신기록을 세워도 무효다. 수영에선 물의 저항을 줄인다는 전신수영복 착용을 금지했다. 모두 기록 수립을 돕는 외부 요인을 최소화하고, 공정한 경기 환경을 만들려는 의도다.
규칙이 있는 스포츠가 아닌 영화계에서 한국 관객 동원 1위란 신기록은 정말 중요할까?
<도둑들>의 투자·배급사 쇼박스는 10월 초 배급사 집계기준으로 약 1303만명을 모아 <괴물>(2006년)의 기록(1301만9740명)을 깼다고 발표했다. 상설극장 가입률이 99.9%인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공식 집계로는 여전히 1298만명이지만, 쇼박스는 미가입 극장의 관객까지 합하면 <괴물> 기록을 넘는다고 밝혔다.
<광해, 왕이 된 남자>는 개봉 8주차인 현재 1110만명이 관람했다. 재미와 감동을 갖췄다는 입소문 덕에, 관객 수는 좀더 늘어날 전망이다. 영화계에선 <광해> 투자·배급사 씨제이(CJ)의 고위 임원이 800만명을 넘긴 시점에, ‘다시 첫 주 개봉하는 심정으로 임하라’는 취지로 직원들을 독려했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영화인들 사이에선 관객 신기록이 의미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어떤 장르, 어떤 내용이 그 시대 관객의 마음을 얼마나 잡았는지 보여주는 수치”란 것이다. 영화에 투자하면 수익을 남길 수 있다는 기대감을 투자자들에게 강렬하게 심는 효과도 있다고 말한다.
매해 전국 스크린 수가 달라지는 등 외부 환경이 동일하지 않은 조건에서 세우는 ‘관객수 1위’를 중요한 기록으로 볼 수 없다는 반론도 많다. 한 제작사 대표는 “단관 극장을 돌며 1993년에 103만명이나 모은 <서편제>나, 복합상영관이 없던 99년에 전국 582만명을 동원한 <쉬리> 등이 지금처럼 전국 스크린 약 2000개관인 상황에서 개봉하면 1000만 이상 영화가 됐을 수 있다”고 했다. 2000년 720개였던 스크린 수는 지난해 1974개관으로 늘었다. 극장을 얼마나 확보하느냐라는 배급력이 관객 동원에 영향을 준다는 것도 알려진 사실이다.
<도둑들>의 경우 상영 막판엔 극장매출액에서 60%를 가져가는 극장 몫을 더 올려주면서 장기상영을 유지했다는 비판도 영화계에서 나온다. <광해>도 개봉 7주차부터 평일엔 좌석점유율이 11~13%였지만, 씨제이 계열인 씨지브이(CGV)가 200개관 넘게 지탱해주며 전국 400~500개관에서 상영됐다. 한 영화 프로듀서는 “1000만을 넘겼다면 결국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라면서도 “기록 욕심 때문에 필요 이상 스크린을 유지하는 무리수를 둬, 그 영화의 평가를 스스로 깎는 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핸드볼에선 ‘3m 거리 확보’란 규칙이 있다. 골키퍼와 단독으로 맞서는 ‘7m 던지기’에서도, 골키퍼는 골문에서 4m 앞까지만 나와 막을 수 있다. 최소 3m 떨어지란 것이다. 공에 세게 맞지 않게 수비수를 보호하면서, 합당한 공격 기회를 갖자는 것이다. 작은 영화도 최소한의 상영기회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공격적으로 관객규모를 늘리려는 대기업 투자·배급사가 참고할 만한 핸드볼의 규칙 정신이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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