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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방망이 든 ‘어버이’에게 권하는 변화구

등록 2012-11-30 19:35

영화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
영화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영화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에 등장하는 거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다. 될성부른 떡잎을 미리 알아보고 남들보다 먼저 침 발라 두는 직업이다. 그가 고른 재목이 프로야구 경기장에서 날고 기는 모습을 지켜보는 즐거움에 취해 일에만 매달렸고, 이젠 야구방망이에 공이 맞는 소리만 듣고도 좋은 타자를 알아보는 경지에 올랐다. 문제는, 그도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다.

눈이 침침하다. 공이 잘 보이지 않는다. 후배들은 계속 치고 올라온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스카우팅 시즌. 은퇴를 권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건재를 과시하며 멋지게 한 방 먹이고 싶은 거스는, 어느 고교 유망주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먼 여행을 떠난다.

자, 우리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말하자면 거스는 ‘독 짓는 늙은이’고 ‘방망이 깎던 노인’이다. 평생 독만 지을 줄 알았지 마누라고 자식이고 건사할 줄 모르던 송영감처럼, 아내 먼저 떠나보내고 홀아비 된 거스는 좋은 아빠 되는 것도 애당초 글러먹은 사람이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깎다가 놓으면 되나?”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며 마냥 방망이를 깎아대던 노인처럼, 거스도 자신만의 속도와 방식을 고집하며 느릿느릿, 꼬장꼬장하게 선수를 감별해낸다. 다른 사람 얘기엔 절대 귀 기울이지 않으면서 자기 얘기에 반응이 시큰둥하다 싶으면 불같이 화를 내는 옹고집의 끝판왕. 까놓고 말해서 한마디로, 주변 사람 참 피곤하게 만드는 노친네다.

그런데 주변 사람 참 피곤하게 만들던 어르신께서 알고 보니(혹은 죽고 나니) 사려 깊은 ‘진짜 어른’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슬피 우는 젊은 것들이 소설엔, 그리고 영화엔 제법 자주 등장한다. 늙었지만 낡지 않은 베테랑들이 젊은이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며 기어코 당신들의 가치를 잘도 증명해내시는가 하면, 성격은 괴팍해도 사람은 진국이라는 찬사까지 이끌어내신다. 우리는 이미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고 그런 식의 판타지를 참 많이 보아 왔다. 하지만 정작 인생을 살면서는 그런 종류의 실제 경험을 거의 해보지 못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다.

영화에서와 같이 현실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내 기도가 충분히 간절하지 못했는지, 살면서 ‘진짜 어른’을 만나는 건 힘든 일이 되었다. 앞으로 내가 ‘진짜 어른’으로 나이 먹는 건 더더욱 힘든 일이 될 게 틀림없다. 세상은 우리가 베테랑이 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으며 베테랑을 별로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너무 빨리 날아오고, 단 한 번의 헛스윙만으로도 당장 주전 자리에서 밀려나기 십상. 3할 타자도 10번 중에 7번은 안타를 쳐내지 못하는 게 야구이지만, 불행히도 현실의 룰은 야구보다 훨씬 더 야박하다. 어쩌면 거스가 그렇게 야구장을 떠나기 싫어하는 이유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3번의 성공을 위해 7번의 실패를 용인해주는 일터가 세상엔 그리 많지 않은 법이니까.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영화처럼, 거스처럼, 묵묵히 방망이나 깎고 앉아 있다고 어른 대접 해주는 게 아니라며,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어르신들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어르신보다는 어버이라 불리는 걸 더 좋아하는 그분들, 세상엔 ‘젊은 혈기’만 있는 게 아니라 ‘늙은 혈기’란 것도 있음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그분들이 혹 더 나이가 드신 뒤에는, 그래서 그분들의 악에 받친 풀스윙 또한 빛바랜 추억이 될 먼 훗날에는, 우리 시대 일부 어버이들의 빗나간 존재증명조차 낭만적으로 회고하며 언젠가 이런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수필 ‘방망이 휘두르던 노인’의 마지막이 부디 이러하기를.

“가스통을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요사이는 ‘빨갱이새끼’라고 욕하는 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애수(哀愁)를 자아내던 그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사십여 년 전, 방망이 휘두르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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