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이 원혼 깃든 머리카락의 저주
머리카락이 아시아 공포영화에서 섬뜩함을 주는 대표적인 장치로 자리잡은 지는 이미 오래다. ‘머리카락은 기억을 먹고 자란다’는 속설 또한 왠지 서늘하게 다가온다. 그러고 보면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발’이라는 기막힌 소재를 다룬 공포영화가 왜 이제서야 나왔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가발>은 소재에서부터 일단 두어 수쯤 따고 들어간 공포영화다.
지현(유선)에게는 투병생활로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버린 동생 수현(채민서)이 있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잃고 서로 의지해온 두 자매는 서로를 끔찍이 위하는 사이다. 지현은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고 퇴원하게 된 수현에게 “병세가 호전돼 퇴원하는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민머리를 예쁘게 감싸줄 가발을 선물한다.
가발을 쓴 수현은 날로 변해간다. 얼굴은 점차 생기를 되찾고 성격도 쾌활해진다. 아픈 사람의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게 된 수현은 잠자리에서도 가발을 벗지 않을 정도로 가발에 집착한다. 나중에는 언니의 남자친구 기석(문수)을 유혹하는 등 이상한 모습을 보이고, 막역했던 두 자매는 묘한 질시와 반목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한 수현을 지배하는 건 가발의 이상한 힘이다.
이 대목에서 가발로 만들어진 머리카락의 주인에 대한 사연이 드러나는 건 예정된 수순. 애절한 사연을 간직한 채 죽은 이의 원혼이 가발에 깃들어 한을 풀려 한다는 사실은 이제 반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예상 가능한 줄거리다. 다만 맨 마지막에선 쉽게 예상하기 힘들 정도로 충격적이고 슬픈 결말이 기다린다.
<가발>의 장점은 세심한 연출로 섬뜩한 분위기를 만든 몇몇 장면들에서 발휘된다. 카메라 렌즈 속에서만 수현의 머리가 마구 흩날리는 장면이나 기차 창문으로 비친 수현의 모습이 뒤틀리는 장면, 버스 뒷자리에 탄 여학생들의 뒷모습 장면 등은 깜짝 놀래키는 공포가 아니라 밑바닥부터 서늘하게 조여오는 공포감을 선사한다. 단편영화 <빵과 우유>로 호평을 받았던 원신연 감독의 연출력이 빛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많이 접해본 듯한 이야기 틀거리의 진부함은 순간순간의 섬뜩함이 영화 전체를 꿰뚫는 덩어리 큰 공포로까지 이어지는 걸 방해한다. 순간적이고 감성적인 공포보다는 탄탄한 이야기 구조에서 서서히 밀려드는 공포감이 더 클 수 있음을 놓친 것 같다. 12일 개봉.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사진 영화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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