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영 영화평론가
저공비행
기만적 대립 이끄는 ‘웰컴 투 동막골’ 단지 영화일뿐일까
남북한이 비밀리에 공동으로 핵무기를 개발한다. 이를 알아차린 미국이 핵무기 양도를 요구해온다. 남한장교는 싫어도 그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지만, 북한장교는 이를 거부하고 핵무기를 탈취한다. 핵무기를 지닌 북한 장교 일행과 그를 쫓는 남한 장교 일행은 혜성이 일으킨 시간 교란으로 1572년의 조선에 떨어져 28세의 평범한 청년 이순신을 만난다.
영화 <천군>은 그렇게 시작한다. 이 영화는 명백히 핵무기 보유 혹은 핵 민족주의를 지지한다. 또한 이순신이 21세기의 한국에 도착한다면 같은 견해일 것이라고 암시한다. 영화를 보면서 그 견해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견해의 내용도 위험하지만, 이 견해가 현실적 판단력을 단숨에 무력화할 만큼 정서적 호소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견해에 다수의 한국인이 동의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 한국인의 52%가 자국의 핵무기 보유에 찬성한다. 일본인은 86%, 독일인은 93%가 반대한다. <동아일보>와 <아사히신문>이 한국, 미국, 중국, 일본, 프랑스, 독일 국민을 대상으로 공동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그렇게 나왔다고 8월6일 발표했다. 북한 핵무기 보유에도 41%가 찬성했다. 특정 언론사의 여론조사여서인지, 아니면 다들 예상한 결과여서인지, 이 조사 결과는 다른 매체들의 주목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무섭고 놀라운 결과다.
뒤이은 분석이 말문을 아예 막는다. 기사는 남북한의 핵무기 보유에 대해 30, 40대의 찬성률이 20, 50대보다 훨씬 더 높다는 사실을 두고, ‘30, 40대 걸쳐 있는 진보적 386세대의 성향을 반영한 것’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이 해설이 만에 하나 정확하다면, 한국의 소위 ‘진보적 386’은 극우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들의 견해가 <천군>의 견해이며, 또한 정확히 박정희의 견해이다. 이 견해의 근거는 한국인의 63%(역시 6개국 중 최고)가 동의한 ‘핵무기를 가지면 국제사회에서 더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는 바로 박정희의 신념이기도 했던 문항이 말해준다.
남북한이 이런 정신으로 가까워지면 그래서 통일이 되면 그건 두려운 재앙이다. 그런 두려움의 눈으로 보면 많은 게 삐딱하게 보인다. 지난주 개봉해 극장가를 장악한 <웰컴 투 동막골>은 재미있고 순박한 영화다. 그러나 남북한 병사가 손잡고 외국군과 싸운다는 설정이 <천군>과 같다는 점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동아시아 축구대회를 전하는 기사의 ‘북한, 일본에 통쾌한 설욕’이라는 제목도 함께 떠오른다. 북한은 우리편, 일본은 상대편으로 가르는, 옛날이라면 매우 진보적으로 보였을 이 제목도 불길해 보인다. 그리고 이 신문, <한겨레>의 제호도 바뀌면 좋겠다.)
동막골은 지상에 없는 이상향이다. 그 이상향에 한복을 입은 순박한 사람들이 조화롭고 행복하게 나비와 꽃과 더불어 살고 있다. 미친 여자조차 그 완벽한 조화의 일부다. 한반도의 누구도 그때 그렇게 살지 못했겠지만, 한민족의 시원적 고향을 이렇게 상상한다는 건 귀엽고 천진한 일이다. 이 아름다운 곳과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동화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남북한 병사, 심지어 미군 조종사까지 동막골 편을 드는 건 당연하다.
이 영화의 은밀한 정치학은 이 판타지의 공간에 연합군(사실상 미군)을 대립시키면서 작동한다. 이곳은 개인(들)이 창작자의 상상력을 징검다리 삼아 건너갈 순 있지만, 역사적 실체로서 한국전쟁의 장에 포섭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그럼에도 미군이 그 곳을 폭격하려 할 때, 이 영화의 판타지는 기만적 대립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순수한 우리 대 나쁜 그들의 대립이다. 혹은 순수한 한민족 대 나쁜 외적의 대립이다.
이 영화의 좋은 점은 <천군>처럼 핵무기 같은 남근을 찬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며, 나쁜 점은 끝내 이 기만적인 대립을 버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잔뜩 불안해진 나는 자꾸 나쁜 점이 크게 보인다. 허문영/영화평론가
이 영화의 좋은 점은 <천군>처럼 핵무기 같은 남근을 찬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며, 나쁜 점은 끝내 이 기만적인 대립을 버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잔뜩 불안해진 나는 자꾸 나쁜 점이 크게 보인다. 허문영/영화평론가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