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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흥, 해적들 목숨 따위!’ 코웃음 칠 수 없는 이유

등록 2012-12-14 19:37

영화 <익스펜더블>
영화 <익스펜더블>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올해 가장 많은 별똥별을 볼 수 있다는 밤을 기다리며 이 글을 쓴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쌍둥이자리 근처에 유성이 쏟아져 내릴 것이다. 서쪽 하늘에 시간당 최대 120개. 소행성 ‘3200 파에톤’이 태양의 중력 때문에 부서지며 우주에 뿌려 놓은 부스러기들이 매년 12월 지구 대기권에 빨려 들어와 불타는 쌍둥이자리 유성우. 그 낭만적인 이벤트를 앞두고 문득, 제미니를 생각한다.

‘쌍둥이자리’의 영어 표현 제미니(Gemini)를 배 이름으로 쓴 건 싱가포르 선박회사였다. 2011년 4월30일 싱가포르를 떠나 케냐로 가던 제미니호가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됐다. 모두 582일. 마지막까지 잡혀 있던 한국인 선원 4명이 풀려나는 데 걸린 시간. 해적들은 돈을 얻었고 선원들은 목숨을 돌려받았다. 그윽했던 ‘첨밀밀의 여명’을 그리워하는 나와 달리 화끈했던 ‘아덴만의 여명’을 그리워하는 치들에겐 몹시 싱거운 결말이겠지만,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끝나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선원들은 물론이려니와 해적들도 죽지 않고 살아서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김영미 분쟁지역 전문 피디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 흥, 해적들 목숨 따위! 코웃음 쳤을지도 모른다. 해적 8명을 사살한 청해부대의 삼호 주얼리호 구출작전, 일명 ‘아덴만의 여명’에 온 나라가 열광하고 있을 때 김영미 피디는 <시사인(IN)>에 이런 글을 기고했다. “그들도 원래부터 해적은 아니었다. (중략) 하지만 내전과 동시에 소말리아 해역에 나타난 외국 어선들은 매년 약 3억달러어치의 참치와 새우, 바닷가재 등 어류와 해산물을 대량으로 쓸어갔다. 그들은 소규모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소말리아 어부들의 생존 기반을 흔들어놓았다. 심지어 외국 어선은 처리비용이 유럽에서 1t당 약 1000달러 드는 폐기물을 1t당 3달러를 주고 바다에 버렸다. 소말리아 어부들은 생계수단을 잃어갔고 외국에 대한 적개심이 커졌다. 그래서 자체 해안경비대를 조직해 외국 어선들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벌금 명목의 협상금을 타냈는데, 이것이 해적 사업의 시초가 되었다.”(<시사인> 135호, ‘소말리아 해적 비즈니스 배후는 미국’)

말하자면 소말리아 해적은, 그들의 조국이 서구 열강의 중력 때문에 부서지며 바다에 뿌려 놓은 부스러기 서민들이다. 먹고살려고 발버둥치다 외국 배의 항로에 빨려 들어와 불타고 불태우는 별똥별이다. 그물 대신 에이케이(AK)47 소총을 쥐여준 건 결국 우리들. 적어도 소말리아보다는 ‘잘사는 나라’ 사람들. 그러니 어쩌면 자업자득. 아마도 인과응보. 그것이 내가 흥, 해적들 목숨 따위! 코웃음 칠 수 없는 이유다. 제미니의 유성우, 그 낭만적인 이벤트를 앞두고 문득, 제미니호를, 소말리아를 다시 생각하는 이유다.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영화 <익스펜더블>(사진)의 첫 장면. 폼나게 말해서 노년의 어벤저스요, 솔직히 말하면 해병전우회와 다를 바 없는 글로벌 예비역들이 헬기 타고 날아간 곳이 바로 아덴만이었다. 불세출의 피트니스 액션 영웅 실베스터 스탤론께서 ‘솔선을 수범’해서 소말리아 해적을 일망타진한 뒤, 이를 ‘전화위기’의 기회로 삼아 ‘지하경제 활성화’를 꾀하는 전세계 몹쓸 놈들 모조리 소탕하러 다니는 이 영화에서, 해적들은 별다른 저항 한번 못해 보고 아메리칸 액션 영웅들의 기관총에 벌집이 되며 쓰러진다. 바쁜 ‘벌꿀’은 슬퍼할 시간이 없듯, 바쁜 용병들도 슬퍼할 시간이 없었겠지. 그들은 웃으며 배를 떠났고 해적은 갑판 위에 소품처럼 쌓여 있었다.

그들도 한때는 어부였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존 밀러 대위(톰 행크스)가 한때는 교사였듯이. 분필을 버리고 총을 들어야 했던 교사의 죽음 앞에 슬피 우는 것도 영화이고, 그물 대신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어부의 시체를 앞에 놓고 낄낄대는 것도 영화다. 그냥 뭐, 그렇다는 얘기다.

오늘 밤, 별똥별을 보려 한다. 쌍둥이자리도 찾아보려 한다. 하늘이 아름다울 것이다. 그들의 바다와는 다르게.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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