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영화·애니

일생에 단 한 번 ‘확실한 감정’이 온다면…

등록 2013-01-06 20:15

민용근 영화감독
민용근 영화감독
민용근의 디렉터스컷
한해를 정리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할 시기가 오면 뭐라도 다짐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곤 한다. 딱히 정리할 것도 없고 새로 다짐할 것도 없긴 하지만, 올해도 괜한 의무감에 뭐라도 해볼까 고민하던 차에, 다행히 지독한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덕분에 연말과 연초 모두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어물쩍 넘길 수 있었지만 딱 한 번, 넘어가던 구렁이의 배 밑으로 따끔한 침을 맞은 것같이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이 있었다. 그건 바로, 깊고도 아득한 눈빛을 가진 클린트 이스트우드 할아버지가 아득하고도 깊은 눈빛을 한 채 이런 말씀을 내뱉으시던 순간이었다.

“이렇게 확실한 감정은 일생에 단 한번만 오는 거요.”

남들이 이미 다 본 영화를 뒤늦게 보고 호들갑 떨게 될 때는 당연히 겸연쩍은 마음이 드는 법이지만, 어쨌든 <매디슨카운티의 다리>에 나오는 이 대사를 듣는 순간, 나는 잠시 감기를 잊고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미 다들 아시다시피 <매디슨카운티의 다리>는 평범하고 갑갑한 일상을 사는 중년 주부 ‘프란체스카’(메릴 스트립)에게 사진작가 ‘로버트’(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타나게 되면서, 그들이 겪게 되는 나흘간의 짧지만 영원했던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송곳과도 같았던 위의 대사는 우연히 찾아온 사랑의 운명 앞에 선 두 사람이 그 운명을 믿고 함께 떠날 것인지, 아니면 각자의 추억으로 묻고 일상 속으로 돌아갈 것인지 갈등하는 순간에 나온다. 남편과 아이들을 버리고 떠날 수 없다며 마지막 순간 주저하는 프란체스카를 향해 로버트가 말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하오. 한번도 말해본 적이 없소. 이렇게 확실한 감정은 일생에 단 한번만 오는 거요.”

그 ‘확실한 감정’이라는 것에 대해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그건 누군가를 향한 사랑일 수도, 이루고 싶었던 꿈일 수도, 새로운 시대를 향한 열망일 수도 있다. 다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생에 한번뿐이라는 그 감정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던 적이 있었던가. 내가 알고 있는 그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었던가. 아니면 그 순간은 아직 오지도 않은 것일까. 만약 그 순간과 마주친다면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을까. 그 ‘확실한 감정’이 지금까지 쌓아온 삶을 버려야만 이루어지는 것일 때, 나는 지금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까.

로버트의 그 말을 들은 프란체스카는 고통스런 울음을 토해내지만, 결국 마지막 선택의 순간 차문을 열고 로버트를 향해 달려 나가지 못한다. 다만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용기를 낸다. 자신의 삶이 다한 이후, 비밀스러웠던 그 짧은 사랑(혹은 외도)을 글을 통해 자식들에게 남긴 것이다. “무덤까지 안고 갈 수는 있지만, 인간은 늙어갈수록 두려움이 사라진단다. 자신을 알리는 일이 중요하게 느껴져. 이승에 사는 짧은 기간 동안 사랑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알리지 못하고 죽는 건 너무 슬픈 일인 것 같구나.”

누구나 자신이 가지 못했던 길에 대한 회한을 안고 산다. 가지 못했던 그 길은 자신이 희망했던 그 길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또다른 일상으로 향하는 반복된 길일 수도, 자신의 삶을 수렁으로 빠뜨릴 나락의 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에야 하게 되는 뒤늦은 회한보다는, 무모하지만 용기 있는 선택이 맨 얼굴의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방법일지 모른다. 결국 한번뿐인 삶이다. 내겐 클린트 이스트우드 할아버지의 저 한마디가 마치 새해를 열게 하는 덕담이자 화두처럼 들린다.

민용근 영화감독

<한겨레 인기기사>

헌재 사람들 “이동흡만 아니면 했는데…”
박근혜 자서전 제목이 힐링이 될줄이야 ‘씁쓸’
50억 국민방송 정말 만들어질까
딸 위해 인생 바쳤는데 나 때문에 숨막힌다고?
‘10대 성추행’ 고영욱 영장 기각한 이유
‘권상우 협박’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씨 사망
‘제주 해적기지’ 발언 고대녀 김지윤 결국…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