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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첫 영화 촬영하던 날, 울컥하고 말았다

등록 2013-01-20 20:56

민용근 영화감독
민용근 영화감독
민용근의 디렉터스컷
단편 영화 촬영을 앞두고 있다. 짧은 영화이긴 하지만,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만만치 않다. 처음엔 혼자만 있던 작업실에 이제는 연출부, 제작부, 미술팀 등 열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모습을 보면 새삼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과장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 모든 과정들이 마치 생명 탄생의 과정처럼 느껴진다고나 할까. 수정되기 전의 정자와 난자처럼 내 머릿속을 부유하던 생각의 조각들이 수백만가지의 우연을 거쳐 하나의 이야기로 ‘수정’되면 그 지점에서 비로소 영화가 시작된다. 아무도 모르는 작은 점 같던 그 생명체에게 살을 붙여 점점 모양새를 갖춰가는 과정. 그리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욕을 먹고, 칭찬을 듣고, 퇴짜를 맞고, 누군가에게서 동참의 말을 듣는 그 순간들을 거치며 ‘나’의 이야기가 영화에 참여하는 ‘우리’의 이야기로 바뀐다. 여러 번 겪었던 과정이지만, 이렇게 하나의 이야기가 나에게서 우리에게로 확장되는 과정은 아무래도 묘하고 신기하다.

예전에 오랫동안 영화를 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 문득 다시 영화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뒤 짧은 단편 시나리오를 썼지만, 막상 이걸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막막하기만 했다. 필름 세대에게 영화를 배운지라, 이미 디지털 시대로 넘어온 시기에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도 막막했고, 주변에서 누구를 끌어들여 함께 영화를 만들어야 할지도 막막했다. 아무것도 없는 광활한 사막 위에서 작은 씨앗 하나를 들고 있는 기분이랄까. 두렵고 막막한 마음에 그냥 묻어둘까도 여러 번 생각했다. 아직까진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므로, 여기서 그냥 묻어둔다면 아무도 모르겠지. 대외적으로 나는 처음부터 씨앗을 들고 있지 않았던 거니까 아무도 모르겠지. 하지만 세상에 존재했는지도 모른 채 사라질 어린 씨앗의 운명을 생각하자니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주변의 친구들에게 조심스럽게 보여주기 시작했고, 몇몇 사람들이 그 존재를 알기 시작하면서 씨앗은 스스로 생명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들어가게 된, 첫 촬영 날이 아직 기억난다. 정신없이 촬영을 진행하다 문득 보게 된 수십명의 배우와 스태프의 모습. 한곳에 집중하고 있던 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난 순간 혼자 몰래 울컥하고 말았다. 무엇 때문에 이들은 이곳에 함께 있게 된 것일까. 어쩌면 없어지고 말았을 그 작은 씨앗이 시작점이 되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그 모든 과정들이 조금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고, 진심으로 감격스러웠다.

어쩌면 언젠가 이 모든 과정을 무심하게 느끼거나, 두려움과 조바심 대신 여유로움으로 즐길 수 있는 날이 오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은 사무실에 열명 남짓 모인 이 광경조차 신기하게 느껴지고, 매일매일이 양념 반, 프라이드 반처럼 두려움 반, 걱정 반으로 점철된다. 하지만 결국엔 함께 하는 사람들이 힘이 되고 헤쳐 나갈 힘이 된다는 것을 믿고 있다.

누구든 자신이 갖고 있는 작은 씨앗을 버리지 말고 나누었으면 좋겠다. 그 씨앗이 영화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계획일 수도 있고, 수줍은 마음일 수도 있다. 용기를 내어 한 발 내딛는 것,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치열한 고민 끝에 작은 씨앗을 얻었다면, 그리고 그 씨앗을 꽃으로 피어나게 하고 싶다면 결국 그 밑거름은 사람의 힘인 것 같다. 나 역시 한동안 잊고 있다, 작게나마 단편 영화를 준비하게 되면서 다시 상기하게 된 새삼스런 교훈이다. 이 생명 탄생의 신비를 오랫동안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건 일종의 다짐이자 반성이다.

민용근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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