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
[토요판] 김성윤의 덕후감
<클라우드 아틀라스>가 흥행 참패라고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한 진지한 토론 없이 작별을 고한다는 건 어딘지 아쉬운 감이 있다. 난 재밌게 봤다. 관객들을 가르치려 든다는 점만 빼놓는다면 굉장히 흥미로운 영화였다. 윤회에 관한 영화, 퍼즐 맞추는 영화라는 평가도 있던데, 이 영화는 명백히도 ‘더 좋은 세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구름 사진을 모아 놓은 책, 즉 ‘구름 도감’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지금 이곳에 없는 세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영화에는 무려 여섯 가지나 되는 ‘혁명’ 에피소드가 나온다. 노예와의 우정, 동성애 욕망의 해방, 진실의 폭로, 감금으로부터의 자유, 복제인간의 존엄,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 등이 그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이 영화가 보여주는 변혁에 대한 그림이다. 반복되는 억압과 폭력의 역사…, 그런데 무려 여섯 번의 ‘혁명들’ 속에서 영화는 (갈취와는 다른) 자본주의적 착취에 관한 문제 설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공산주의가 역사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는 걸까, 아니면 작가와 감독이 흔한 민주당 지지자들이어서 그런 걸까.
물론 인권 문제만으로도 진지한 원작자와 감독들에게 ‘공산주의에도 자리 하나 주세요’라고 떼쓸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의도를 넘어 공산주의 혁명의 자리가 구조적으로 배제된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지구촌의 절반 가까운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변화를 기대하고 있건만, 오늘날에는 자본주의의 바깥, 하다못해 자본주의로부터 가능한 한 먼 곳을 꿈꾸는 것조차 매우 어렵게 됐음을 함축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가 ‘혁명’을 다룸에도 불구하고 노동 해방이나 국가 폐지(혹은 기능전환)같이 거창한 것이 아니라 ‘정의 실현’처럼 인본주의적인 메시지로 귀결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에 가깝다. 억압하는 사람들은 정의를 이렇게 정의한다. “약한 자는 고기가 되고 강한 자는 먹는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자연의 섭리라는 게 있지. 그 섭리를 거스르는 자의 인생은 힘들어지기 마련이야.” 이에 맞서, 억압된 것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삶의 원리를 이렇게 재정의한다. “우리의 인생은 결코 우리 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 얽혀 있다(bound).”
바로 여기서 <클라우드 아틀라스>가 지목하는 혁명 이야기의 핵심이 제시된다. 그것은 바로 연결(connection)이다. 과거 인권운동의 교의는 ‘개인 그 자체’의 존엄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개인과 개인의 연결’을 중요한 자양분으로 삼는다. 그 연결은 윤회라는 테마를 통해 시간을 가로지르고(“우리가 다른 생애에서도 만나고 또 만나는걸요”), 사랑이라는 테마를 통해서는 공간을 가로지른다(“떨어지면 내가 잡을게요”).
시간적으로 가장 마지막에 해당하는 2321년 에피소드가 원시사회로 제시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호혜적 관계라는 어쩌면 원시적인 상태를 회복하는 데 있다고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영화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핼리 베리의 운전 중 추락 장면(1973년 에피소드)에서의 카메라 움직임도 빼먹을 수 없다. 카메라는 보조석에서
그녀를 보다가 깜짝 놀란 듯 추락 직전에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입수한다.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동반 추락한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이러한 경험은 단순한 생동감 이상의 그 무엇, 바로 타인(캐릭터)이 나(관객)와 같은 공간, 같은 처지에 있다는 느낌을 제공한다.
영화가 끝나고,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선진자본주의 국가에 사는 사람들이 오늘날의 세계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최대 한도를 지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내가 고리타분한 건진 모르겠지만, ‘변혁 없는 해방’ 그리고 ‘조건 없는 친교’ 같은 것들로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고 믿는 건 어쩐지 시시하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그 ‘한도’조차 버거웠는지 영화 흥행은 저조했지만 말이다.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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