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용근 영화감독
민용근의 디렉터스컷
“믿기 시작하는 순간, 속기 시작하는 거야.” 영화를 보며 문득 <시체가 돌아왔다>에 나오는 류승범의 대사가 떠올랐다. 우리가 확신을 갖고 ‘진실’이라 말하는 것들이 정말 진실일까. 진실의 실체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믿기 원하는 것을 진실이라 이름 붙인 틀 안에 구겨 넣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믿기 시작하는 순간, 그 믿음에 발목이 잡힌 채 속기 시작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더 헌트>는 억울한 누명을 쓴 한 남자의 이야기이자, 진실의 실체에 대한 고민 없이 한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는 집단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루카스는 유치원 교사이다. 아이들과는 스스럼없이 친구처럼 지내며, 아이들 역시 그를 친구이자 선생님으로 격의 없이 대한다. 이혼한 아내와 아들 양육 문제로 다투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그의 일상은 평화롭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한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닥친다. 친구 테오의 여섯살짜리 딸 클라라가 그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변에 말한 것이다. 루카스에게 애정표현을 했다 주의를 받은 일, 오빠가 보여준 야한 동영상의 이미지가 혼재된 채 순간적으로 내뱉어진 클라라의 거짓말은 다른 어른들에게 알려지며 일파만파 퍼져나간다.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맹목적인 확신 아래, 마을 사람들은 루카스를 파렴치범으로 낙인찍은 채, 벼랑 끝으로 몰아세운다. 영화는 클라라의 거짓말과 루카스의 결백을 초반에 보여준 뒤, 진실이 왜곡되고 은폐되는 과정, 그리고 그 속에서 루카스가 겪게 되는 억울함을 촘촘하게 그려낸다.
루카스의 억울한 심정에 이입하며 영화를 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 초반에 그 ‘진실’에 대해 명백하게 보여주지 않았다면 나는 루카스의 결백을 온전하게 믿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나 또한 마을 사람들처럼 그를 의심하고 매도하지 않았을까. 마을 사람들은 나름 정의로운 마음으로 클라라를 보호하려는 어른들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루카스는 ‘확실친 않지만 의심해볼 만한’ 요건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텔레비전이나 뉴스에 나오는 수많은 성범죄자들의 이미지들이 그 요건으로 치환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웃의 평범한 아저씨, 동네 오빠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악한 본성을 드러내곤 한다. 때문에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성 범죄자에 대한 이미지가 건실하고 평범해 보이는 루카스에게 투영되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렇게 의심해볼 수도 있겠네’라며 자연스레 생각하다가 순간 섬뜩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그렇게 보기 시작하면, 그렇게 믿어지는 것이다. 이 영화 속에 나오는 마녀사냥은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쉽게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나 자신의 일이 아니니까.
이 영화와 비슷한 소재의 일본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루카스처럼 억울하게 성추행범으로 몰려 오랜 법정투쟁을 하다 결국 유죄판결을 받게 된 주인공의 독백. “나는 처음으로 이해했다. 재판은 진실을 밝히는 곳이 아니다. 재판은 피고인이 유죄인가 무죄인가를 모아들인 증거를 가지고 임의로 판단하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임의적인 판단’일 뿐이지 ‘진실’ 자체가 아닐 수도 있다. 믿기 시작하는 순간, 속기 시작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 과정 속에서 필요한 건, 진실에 대한 겸손함이다. 내가 곧 진실이며 정의라는 오만한 확신. 그 의도는 비록 선의에서였을지라도, 그것이 악의의 화살로 변해 누군가에게 날아갈지 모른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거나, 돌이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민용근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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