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지슬>에 출연한 배우들은 “빚을 얻어 찍은 오멸 감독의 뚝심이 없었다면 나오지 못했을 영화”라고 얘기했다. 배우들도 영화 수익이 나면 합당한 출연료를 받기로 하고
‘노개런티’로 작품에 동참했다. 왼쪽부터 <지슬> 출연자들인 문석범·김순덕·강희·양정원씨.
[송기자·조피디의 엔딩크레디트 ‘세 줄 밑’]
영화 ‘지슬’ 출연 제주 무명배우들
“어여 앉아 고기 좀 드쇼.”
아들 영화의 출연배우들이 들어오는 걸 보자, 오멸 감독의 아버지가 고기접시를 얼른 배우들 쪽으로 밀었다. <지슬>의 제주 개봉 다음날인 2일, 동네잔치를 하려고 흑돼지 한 마리를 막 잡았다. 동상까지 걸리며 <지슬>을 찍은 배우들은 고기 한 점 집어드는 것도 잠시 잊고 ‘2011년 겨울 촬영’으로 기억을 돌렸다. 그들은 “영화 속 주민들처럼 추운 새벽에 지슬(감자)을 삶아먹으며 촬영하기도 했다”고 떠올렸고, “너무 추워 뇌졸중이 오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내색하지 않으니 엄살을 못 피우겠더라”며 웃었다. 때론 다음날 배우·스태프가 먹을 밥값이 없어 급히 돈을 빌려가며 찍었다는 이 저예산영화가 최근 세계 최고 독립영화제인 미국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으니, 출연자 문석범(53)씨도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나”라며 놀라는 것이다.
<지슬>에서 땅 구덩이에 숨은 주민들 모습.
촬영지는 제주 동백동산.
사실 기자도 놀란 대목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전문배우들도 아닌 이들이 어떻게 그토록 극에 몰입했을까. 영화에서 동네에 혼자 남은 딸 ‘순덕이’를 걱정하는 ‘엄마’로 나온 김순덕(58)씨가 말을 꺼냈다. 그는 농사를 짓다가 50대부터 제주 민요패 ‘소리왓’에서 활동하고 있다.
“4·3 당시 외할머니·외할아버지와 외삼촌들이 모두 총에 맞아 돌아가셨죠. 당시 14살이던 친정엄마는 뒤에서 그걸 다 보셨대요. 엄마의 6살 여동생은 불타는 초가집으로 집어던져졌고요. 4·3을 알리고 싶어 <지슬>에 출연했는데, 내가 4·3 때 돌아가신 외할머니 역을 맡은 게 아닌가 생각하니 눈물이 났어요. 진지하게 연기할 수밖에 없었죠.”
영화에서 군인한테 험한 일을 당하고, 동네 청년 만철이의 가슴을 울리는 ‘순덕이’를 맡은 강희(22)씨는 “제주 4·3평화공원에서 사진 한 장을 본 것이 도움이 됐다”고 했다. 올해 한라대(시각디자인)를 졸업한 그는 <지슬> 출연 이전까지 연기를 해본 적이 없다.
외할머니 등 희생당한 김순덕씨 “진지하게 연기할 수밖에 없었죠” 연기 한번도 해본 적 없던 강희씨 “4·3 피해자 사진 한 장에 큰 충격”
13년째 이웃돕기 공연 양정원씨 “진실 밝혀야 비극 되풀이 안돼” 제주 민요패 활동하는 문석범씨 선댄스 수상 소식에 “세상에…”
“옷이 벗겨진 젊은 여자 사진이었죠. 눈을 뜨고 있었던가? 뭔가…, 무력하고 허무한 듯한 눈이었어요. 4·3을 거의 몰랐는데, 사살명령으로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죽은 걸 알았을 때 충격이었죠.”
‘순덕이’가 총살 위기에 처한 장면. 촬영지는 제주 용눈이오름.
<지슬>을 제작한 ‘자파리연구소’가 제주 아라동에서 운영하는 ‘간드락소극장’에서 2일 만난 4명의 배우들은 제주 출신 비전문배우다. 영화에서 청년들에게 “아, 이놈의 시키”라고 윽박지르며 웃음을 자아내는 ‘용필 아저씨’를 연기한 양정원(46)씨는 제주에서 13년째 어려운 이웃을 위한 ‘사랑의 콘서트’를 해온 포크가수다. 1994년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마비까지 갔던 그는 지금도 약간 다리를 절고 손가락 움직임이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상태이지만 기타를 놓지 않고 있다. 절친한 오 감독의 영화 <어이그 저 귓것> 등에 출연했다. 은행원이었다가 현재 민요패 ‘소리왓’에 있는 문석범씨는 <지슬>에서 집에 두고 온 돼지를 걱정하는 ‘원식이 삼촌’으로 나온다. 이들 모두 1948년 11월 주민들을 ‘폭도·빨갱이’라고 몰아세워 사살하려는 미군정의 소개령을 피해 제주 큰넓궤 동굴에 숨은 그때의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영화에서 맡았다.
“곧 죽을 것도 모르고, ‘내일모레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믿을 만큼 당시 주민들은 순박했죠. 실제 48년에 총을 쏘는 군인들이 동굴로 들어오지 못하게 주민들이 고추 연기를 피웠는데, 영화촬영 때도 진짜 말린 고추를 태웠죠. 어두운 굴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얼마나 살고 싶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죠.”(양정원)
김순덕씨는 “울먹울먹하며 그 장면을 찍었다”고 했다. 큰넓궤는 안전모를 쓰고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가는 통로를 지나 사다리를 타고 밑으로 내려가면 나오는 동굴이라, 촬영도 쉽지 않았다. “폐소공포증이 있으면 들어가지 못할 곳”이라고 그들은 얘기했다.
[관련영상] 영화 ‘지슬’ 출연 제주 무명배우들 (엔딩크레디트 세줄밑#14)
문석범씨는 “자신들이 폭도로 몰렸기 때문에 자식들한테 피해가 갈까봐 4·3을 말하지 않고 지냈던 제주 분들이 이 영화를 보고 감정을 억누르며 극장에서 나가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미어졌다”고 했다. 그는 “이제 그분들이 삶을 정리하기 전에 최소한 4·3의 응어리라도 풀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양정원씨는 “이 영화가 4·3의 남은 숙제를 다 해결해줄 순 없지만, 제사를 지내는 마음으로 넋들의 한을 풀어주는 ‘해원’의 영화”라고 했다. 그는 “우리 역사 교과서에 4·3은 두어 줄 정도밖에 설명되어 있지 않다. 4·3의 상처를 치유하고,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밝혀야 이런 비극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1일 제주 극장 한 곳에서만 먼저 개봉한 <지슬>은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으로 상영 1주일 만에 관객 5000명을 넘었다. 21일부터 전국에서 확대상영된다. 제작진과 배우들이 이 작품에 얼마나 진심으로 매달렸는지는 ‘순덕이의 눈물’에서 엿볼 수 있다. 영화에서 ‘순덕이’는 모진 상처를 입고도 울음을 누르지만, 그를 연기한 22살 강희씨는 그런 순덕이의 통증을 온몸으로 겪어서인지 “끝까지 이 역을 스스로 해냈다는 것에…”란 말을 하다 끝내 눈물을 떨어뜨렸다.
제주/글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영상·사진 조소영 피디azuri@hani.co.kr<한겨레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