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김영진의 시네마즉설
<폭스파이어>
<폭스파이어>
열네번째를 맞는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린 4월25일, 개막작 <폭스파이어>의 로랑 캉테 감독과 주연 여배우 케이티 코스니를 만났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필자는 5개월 전부터 이 영화제의 수석 프로그래머를 겸하고 있다. 그동안 기자와 평론가 입장에서 영화제 개막식을 취재한 적은 있었지만 영화제 스태프 입장으로 게스트를 접하니 묘한 기분이었다. 로랑 캉테와 케이티 코스니는 정수기에서 걸러낸 물 같은 느낌을 주는 영화인들이었다. 예술가연하는 자의식이나 스타배우의 현시욕이 전혀 없었다. 여배우는 몇번이나 봤을 자신의 출연작을 기자시사장에서 또 봤고 행복한 표정이었다. 로랑 캉테는 개막작 기자회견이 끝나고 개막식까지 남는 시간 동안 혼자 걸어서 호텔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비가 막 갠 전주 시내를 큰 키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맑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폭스파이어>는 영미권의 대표적인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의 동명소설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클래스>로 칸 황금종려상을 받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감독이 영어권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게 특이하지만 영화를 보니 저간의 창작의도가 읽히기도 했다. 이 영화는 1950년대의 미국, 아이젠하워 시대의 풍요와 매카시즘의 광기가 공존하던 시대가 배경이다. 뉴욕 근교에 사는 10대 소녀들이 주인공인데 이 아이들은 어른 남성들에게서 당한 폭력을 되갚아주고자 ‘폭스파이어’란 일종의 어설픈 갱단을 결성하고 마을을 헤집고 다닌다. 영화는 그 시절을 회상하는 매디의 시점으로 또래에 비해 성숙하고 혁명가적 자질이 있었던 렉스의 지휘 아래 폭스파이어 소녀들이 자신들의 이상적인 공동체를 결성해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자급자족은 턱도 없고 각자 벌이도 일정하지 않으며 누구는 더 일하고 누구는 빈둥거리는 상황에서 소녀들은 티격태격하고 내부의 분열을 막고자 리더 렉스는 대담한 범죄를 기획한다. 케이티 코스니가 연기한 매디는 이 모든 상황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본다. 영화의 말미에 소녀들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기성질서의 센 장벽을 실감하게 하는 상황이 나온다. 소녀들은 그저 무력하기만 하다. <폭스파이어>는 그 소녀들이 서투른 게 어려서 그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데서 슬픈 통찰을 남겨준다. 로랑 캉테 감독은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다. 동시에 이상을 추구하는 주인공들의 마음을, 그들의 연약함을, 그들의 모순투성이 결함들을 다 껴안는다. 필자는 인간을 대하는 감독의 그런 태도가 감동적이었다. 불꽃은 오래 타오를 수 없지만 타오르는 순간만은 진실하다는 영화 속 대사는 우리의 순수와 열정이 훼손되고 변색되더라도 그걸 인정할 수 있는 여유 속에서 늘 다시 출발할 수 있다는 깊은 긍정을 느끼게 했다. 작품과 감독의 인상이 이렇게 맞아떨어지는 영화도 드물다. 앞으로도 나는 이 영화를 떠올리면 감독의 인상적인 뒷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그의 풍채와 여유있는 걸음걸이는 소담한 전주시 풍경과 잘 어울렸다.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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