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상효 인하대 교수·영화감독
[문화‘랑’]영화
육상효의 이야기 세상
육상효의 이야기 세상
우리 때의 필독 고전은 헤르만 헤세와 도스토예프스키, 즉 <데미안>과 <죄와 벌>이었다. 스무살의 술자리에서는 곧잘 ‘알을 깨고 나오라’라든가, ‘타인을 단죄할 권리를 가진 비범인’에 대한 이야기가 진지하게 나왔다. 자연스런 교양 대신 어린 마음을 의지할 철학이 필요했다. 우리 뒷세대의 성장기 고전은 달라졌다. <호밀밭의 파수꾼>과 <위대한 개츠비>가 필독서가 되었다. 철학보다는 개인적 성장의 혼란과 상실감을 위로하는 게 중요했나 보다. 한 책이 다루는 것은 고교 시절의 마지막이고, 다른 책은 대학을 졸업하고 세상에 나오는 시기이다.
그래서 나는 거꾸로 내가 완연한 기성이 된 이후에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다. 그리곤 한국에서 이 소설이 위대한 소설이 된 것은 다분히 문화적 의무감 때문이 아닌가 의심했다. 줄거리 중심 소설은 아니었으므로 대중적이 되기에는 힘들었다. 내게 이 소설이 위대했던 점은 그 독백의 내밀함에 있었다. 독백이 무엇인가? 바로 인간이 세상과 홀로 직면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소설을 읽는 가장 강력한 이유이지 않는가? 독백은 행동이 아니기에 관찰이고, 관찰은 뭔가 강력한 것의 번성과 파멸을 지켜보면서 그것을 통해 삶의 필연적인 상실감을 내면화하는 것이었다. 내게 이 소설의 주인공은 개츠비가 아니라 캘러웨이였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는 거대했다. 20세기 초의 보수적 지성들이 고전의 영화화를 반대한 이유는 문자중심주의와 도상에 대한 공포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영화와 문학 사이에 건널 수 없는 매체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전의 영화화는 고전문학의 가치를 범속하게 끌어내릴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전작에서 영화적 시각화, 즉 개념의 도상화에 대한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았던 바즈 루어만 감독이 선택한 것은 먼저 1920년대 미국의 파티에 대한 격렬한 시각화였다. 그것은 너무 강렬해서 우리에게 어떤 거리감도 허용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풍요, 혹은 타락의 의미를 관조하기보다는 그 파티 속에서 타락을 같이 즐겨야만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물론 이 영화적 범속화를 제동하려는 감독의 장치는 있었다. 그것은 피츠제럴드의 아름다운 독백을 보이스 오버로 영화 속에 재현하는 것이었다. 가능하면 글로 쓰인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감독은 캘러웨이가 정신병원에서 회고록을 쓴다는 설정을 추가하였다. 그것은 질펀하게 놀고 난 뒤 황급히 모임의 의미를 정리하는 어느 모임 회장의 말처럼 어색하고 지루한 것이었다. 그래서 원작의 문장이 아름다울수록 많은 영화감독들이 끝내 빠지고 마는 보이스 오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 대부분은 스스로를 개츠비보다 캘러웨이에 동일시한다. 화려한 자보다 그 화려함을 지켜보는 경우가 삶에서는 더욱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공인 이유는 그것들을 관조하고 성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는 그것을 느끼기에 너무 거대했다.
육상효 인하대 교수·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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