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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근심하며 올려다볼 ‘작은 점’ 없길…

등록 2013-06-07 19:27수정 2013-07-15 14:53

영화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11)
영화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11)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2001년 9월11일 뉴욕의 아침.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높은 곳 작은 점들을 보고 서 있었다. 사람이었다. 화염에 휩싸인 세계무역센터 곳곳에서 불길을 피해 몸을 던진 사람들이 마치 건물 파편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아빠이고 엄마이고 남편이자 아내이며 아들이면서 딸이기도 했을 사람들이다. 느닷없이 건물 파편처럼 튕겨져 나와 작은 점 하나로 추락하며 사라져서는 안 되는, 저마다의 이유를 가진 존재들이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 아빠였을 거라고 믿는 아이가 있다. 그날 아침 쌍둥이 빌딩 안에 계셨지만 끝내 시신을 찾지는 못했으니, 보도 사진 속 흐릿한 형체로나마 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아이는 사진 속 작은 점을 확대하고 확대하고 또 확대해 본다. 정말 아빠랑 닮은 것도 같다. 아빠처럼 양복을 입었고 아빠처럼 배가 조금 나온 것도 같다. 하지만 사진 속 검은 형체가 아이의 아빠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11)이라는, 엄청나게 길어서 믿을 수 없게 외우기 힘든 제목의 영화를 다시 보며 우리 시대 ‘작은 점’들에 대해 생각한다. <빌리 엘리어트>와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를 연출한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만들어 지난해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이 아름다운 영화는, 9·11테러 1년 뒤 이야기를 하고 있다. 뉴욕이 쌍둥이 빌딩을 잃던 날 주인공 소년 오스카는 아빠를 잃었고 대신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얻었다. 여전히 오스카의 인생을 지배하는 건 아빠를 닮은 (것만 같은) 사진 속 검은 형체. 그 작은 점 하나가 블랙홀이 되어 아이의 모든 일상과 평온을 맹렬하게 빨아들이고 있다.

그 전에도 겁이 많아 그네를 잘 타지 못했고, 그 전에도 숫기가 없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였지만, 9·11 이후 오스카가 느끼는 강박과 공포의 정도가 훨씬 더 심해졌고 전에 없던 증상까지 새로 더해졌다. 비행기, 우는 아이, 비명 소리, 연기, 도시의 각종 소음이 모두 공포의 대상이다. 특히 “어딘가를 올려다보는 사람들”. 1년 전 그날 아침 풍경처럼 걸음을 멈추고 고개 들어 도시의 높은 곳을 쳐다보며 서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마주칠 때마다 오스카는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혼자만의 블랙홀로 빨려든다. 지상의 사람들에겐 그저 놀랍고 혐오스러운 구경거리에 불과했던, 내가 저 위에 있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고 안도하며 올려다보게 만들었던, 아빠를 닮은 그 작은 점에서 아이의 인생은 아직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이 조립한 자동차 사진을 보았다. 지상의 사람들에겐 그저 놀랍고 혐오스러운 구경거리에 불과했던, 내가 저 위에 있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고 안도하며 올려다보게 만들었던, 그해 여름 뜨거운 공장 지붕 위에 파편처럼 흩어진 ‘저 높은 곳 작은 점’들이 다시 모여 4년 만에 처음 만든 자동차라고 했다. 그들의 인생을 집어삼킨 블랙홀 밖으로 이제 겨우 한 발짝 내디딘 증거인 것만 같아서 기뻤다. 그리고 슬펐다. 다시 부품을 조립해보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등진 24개의 ‘점’과 그들의 남겨진 오스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어딘가를 올려다보는 사람들”로 살고 있다. 소설가 배명훈의 진단처럼 “진로 상담만큼이나 중요한 게 퇴로 상담일지도” 모르는데, “그런 건 아무도 안 해”주는 이 나라에서 사람들은 결국 아파트 옥상에, 송전탑에, 성당 종탑 위에 계속 서고 매달릴 수밖에. 그러므로 수시로 ‘저 높은 곳 작은 점’들을 근심하며 올려다보는 것은, 투신 자살과 고공 농성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포즈이자 제스처인 것이다.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에서 엄청나게 찡하고 믿을 수 없게 짠했던 장면 하나. 오스카는 세계무역센터에서 사람이 추락하는 모습을 포착한 연속 사진을 출력한다. 그리고 그 사진들을 거꾸로 넘겨 본다. 건물 꼭대기에서 추락하던 사람이 건물 꼭대기를 향해 다시 상승하는 사람으로 바뀐다. 그렇게라도 아빠를 다시 살려내고 싶은 그 아이의 마음을 내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다시는 마음 편히 어딘가를 올려다보기 힘든 세상 모든 오스카들의 상처를, 고작 작은 점 하나로 추락하며 사라져서는 안 되었던 사람들의 회한을, 내가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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