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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하루키의 소설을 영화화한다는 것

등록 2013-07-18 19:51수정 2013-07-18 20:16

육상효 인하대 교수·영화감독
육상효 인하대 교수·영화감독
[문화‘랑’] 육상효의 이야기세상
쩐아인훙(트란 안 훙)이 만든 영화 <상실의 시대>를 난 좋아했다. 영화 판권을 팔지 않기로 유명한 하루키가 왜 트란 안 훙에게 영화화의 권리를 주었는지도 이해했다. 어차피 영화는 책에 나온 모든 것을 다 담을 순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처럼 명확한 스토리라인보다는 일상에 대한 작가의 상념과 사색들이 중심을 이루는 작품들은 더욱 그렇다. 하루키는 당연히 영화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소설의 세계를 파괴하는 매체로 보았을 것이다. 자신이 활자로 만들어 놓은 세계가 배우와 배경으로 육화되어 나타나는 것을 견딜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 <상실의 시대>는 애초에 하루키가 소설로 만들어 놓은 세계와 같은 길을 걸어가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이 영화가 상업적 실패를 겪은 이유일 수도 있지만, 감독은 영화가 할 수 있는 것만을 하겠다고 고집한다. 영화는 소설 속에 나오는 스토리의 세세한 전개에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하루키 특유의, 일상적이면서도 계시적인 대사도 포기한다. 구체적인 소설의 세계와 결별한 감독이 집착하는 것은 상실이라는 개념의 시각화이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 남녀 주인공이 말없이 흔들리는 나무 아래서 서 있는 것이 내게는 이 영화의 키 비주얼이다. 상실이라는 것은 바람처럼 일상적이고, 갑자기 슬퍼져 침묵하는 젊은 연인들처럼 명확한 이유가 없다. 다만 그 옆에서 격렬히 흔들리는 나무처럼 일상은 운명의 모습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하루키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고선 즉각 <위대한 개츠비>를 생각했다. 피츠제럴드는 하루키 스스로 말했듯 그의 문학적 스승이기도 했다. 개츠비가 보여줬던 돌이킬 수 없이 화려했던 향락과 파티는 하루키에게는 빛나던 청춘의 한 시절이 되었다. 완전한 관계 속에서 빛나던 청춘의 광채는 수천명이 모여들던 파티의 그것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상실된 후에도 강 건너에 빛나던 불빛을 생각하며 ‘끝없이 뒤로 밀려가면서도 우리는 결국은 앞으로 나간다’던 캘러웨이의 위안은 ‘흔들리는 상실의 과정 속에서도 남아 있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긍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가 그 화려한 파티로 시작해 반짝이는 해협 건너의 불빛으로 마쳤다면, 만약 누가 하루키의 신작을 영화로 만든다면 물 위의 세계와 물 밑의 세계를 오가는 수영장 장면이나, 수백만명이 격류처럼 오가는 신주쿠역 장면, 혹은 몇십년 만에 두 남녀가 마주선 스칸디나비아의 어느 전원 풍경이 중요하게 쓰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와 같은 세대에게 하루키는 일종의 후일담 소설이었다. 격렬한 80년대가 지나고 90년대가 왔을 때, 80년대에 대한 분노와 후회, 죄의식과 패배주의가 일련의 후일담 소설들로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우리보다 10여년 앞서 그 시기를 통과한 하루키는 보다 냉정했다. 분노는 상실이라는 달콤한 감정들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지난 시대가 아니라 지금을, 공동체적 대의명분과의 관계 속에서의 삶이 아니라 개인적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줬다. 어떤 역사 뒤에도 남은 사람들에게는 재즈를 듣고, 요리를 하고 연애를 해야 하는 삶이 있었다.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여전히 하루키가 인기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생각한다. 거대 역사가 없어도, 사람은 시간이라는 이름으로 매일 개인의 역사를 살아가니까 누구에게나 그 뒤에 당면해야 할 일상이 있는 것이리라. 일상의 차원에서 같은 단계의 도시를 살아가는 한, 하루키가 묘사하는 신주쿠역은 신도림역으로 바뀌어도 무방한 것이다.

육상효 인하대 교수·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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