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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24 17:40 수정 : 2005.01.24 17:40



초원이는
조승우는
솔직하다

지난 20일 낮 서울 삼청동의 작은 이탈리아 식당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조승우가 털어놓은 에피소드 하나. 〈말아톤〉 촬영현장 공개 때 그는 취재온 기자 한명에게 몹시 화를 내서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자폐아처럼 한번 포즈를 취해보라”는 주문을 받고 나서였다. 그는 자폐아에 대한 기본적 상식도, 예의도 없는 요구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이 에피소드는 〈말아톤〉 배우 조승우와 인간 조승우에 대한 두가지 실마리를 제공한다. 〈말아톤〉 시사회가 끝나고 그가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자폐아 연기는 어떻게 하셨나요? 힘들지 않았나요?”다. 그는 “운동복 입고 뛰느라 겨울에 땀빼는 게 힘들었어요”라고 대답한다고 한다. 듣는 이로서는 조금 당황스런 대답이다. “배형진군(영화의 실제 모델)이나 다른 자폐아 친구들을 만나면서 자폐아는 ‘자개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꾸밈없는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과 만난다는 점에서 그래요. 달리 어떤 패턴이나 정의로 자폐아로 묶는 건 엄청난 오해라는 걸 깨달았죠.” 그는 ‘자개아’와 ‘(정신연령) 다섯살’이라는 열쇳말만 마음에 새긴 채 연기에 임했다고 한다.

“성장하면서 배우는 자기 검열이나 남의 시선에서 벗어나 내 안의 반응만 솔직하게 표현한다는 게 오히려 편했어요. 연기하면서 이만큼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은 것도 처음이에요.” 그는 촬영 중에 대본에 없던 비행기 소음이 난데없이 끼어들면 즉각적으로 “어, 비행기”라고 중얼거리며 모든 상황에 ‘초원’이로 행동했고 이러다 보니 반복해 찍은 장면 중 같은 대사가 하나도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전체 대사 가운데 반이 ‘본의 아닌’ 애드리브가 됐다. 덕분에 죽어난 건 동시녹음 기사였다고.

자폐아가 아니라 자개아
모든 상황에 초원이가 되어
세상과 만나러 달려왔다,,,,쉬고 싶다

〈하류인생〉 촬영을 마치고 난생처음 호된 몸살을 앓으면서 〈말아톤〉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그가 ‘찌릿한’ 느낌을 받았던 건 이처럼 초원이의 ‘솔직함’과 조승우의 기질이 맞아떨어진 부분도 있어 보인다. 그는 솔직하다. 배우가, 그것도 젊은 배우가 앞의 예처럼 기자의 (어떻게 보면 대단치도 않은) 요구에 응하지 않는 건 요즘 떠도는 ‘연예인 X파일’ 식으로 말하면 ‘철없는’, ‘뜨니까 싸가지가 없어진’ 따위의 감정적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그는 “거짓말하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여느 젊은 배우와 달리 여자 친구(배우 강혜정)의 존재를 숨기지 않는 것도 그런 솔직함의 발로일 터이다.

“나름대로는 천천히 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까 쉬지 않고 달려온 것 같아요. 배우생활 하면서 처음으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보여줄 것도 별로 없는 사람인데.” 그는 정말 숨가쁘게 달려왔다. 〈하류인생〉을 끝내고 바로 시작했던 지난해 뮤지컬 〈지킬과 하이드〉로 받은 뜨거운 환호는 〈말아톤〉에서도 계속 이어질 듯하다. 마라톤으로 따지면 이제 처음으로 숨이 차오르는 지점에 도착한 조승우는 올봄 오랫동안 쉬어온 학교(단국대 연극영화과)를 복학하면서 가쁜 숨을 고를 계획이다.


글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세상을 향해 달린다
세상을 향해 말한다

〈말아톤〉으로 데뷔한 정윤철 감독의 표현을 인용하면 이 영화는 ‘일종의 육아 일기’다. 보통의 육아 일기는 어느 시점에서 마침표를 찍지만 초원이(조승우) 엄마 경숙(이미숙)의 육아 일기는 20년이 지나도 얇아지지 않는다. 초원이는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가는 자폐아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말을 튕기듯 내뱉으며 엄마를, 주변을 힘들게 만드는 자폐아가 달리기를 하면서 세상을 향해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어간다는 〈말아톤〉의 줄거리는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휴먼드라마라면 이쯤에서 한번 질러주겠지. 여기서 눈물샘 한번 찌르겠지’ 하고 예상하며 팔짱을 끼고 보던 냉정한 관객의 마음도 살짝 움직이는 힘과 생기를 가지고 있다. 탄탄한 시나리오와 꼼꼼한 연출력, 두 배우의 뛰어난 연기라는 정답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달리기에 소질이 있는 초원이의 마라톤 완주가 소망인 경숙은, 음주운전으로 사회봉사 명령을 받고 초원이의 학교에 온 왕년의 마라톤 챔피언 정욱(이기영)을 찾아가 훈련을 부탁한다. 건성건성 시간을 때우던 정욱은 내키는 대로인 자신의 지시를 묵묵히 따르며 조금씩 자신에게 스스로를 열어 보이는 초원이와 함께 뛰기 시작한다.

〈말아톤〉은 여유있게 완주하는 마라토너처럼 두시간 동안의 호흡조절을 성공적으로 해낸다. 얼룩말을 좋아하는 초원이가 지하철에서 얼룩무늬 치마를 입은 여자의 엉덩이를 건드렸다가 봉변을 당해 절규하는 엄마 앞에서 초원이가 “우리 아이는 장애아입니다”를 반복하는 목소리에서 관객의 감정을 힘껏 끌어당겼다가, 말아톤 연습팀에서 초원이가 대책없이 앞으로 뛰쳐나가는 모습에서 조였던 감정을 맘껏 풀어놓는 식의 리듬감이 뛰어나다.

정해진 매뉴얼에 성의 없이 이야기를 끼워맞추는 영화들이 쏟아지는 요즘 〈말아톤〉은 성실함의 미덕을 새삼 깨우쳐주는 영화다.

김은형 기자, 사진 시네라인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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