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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TEAM 봉준호

등록 2013-08-13 13:51수정 2013-08-13 16:39

<설국열차> 틸다 스윈튼, 크리스 에반스, 송강호, 봉준호
<설국열차>의 탑승자들이 다시 모였다. 영화 속 절대권력자 윌포드(에드 해리스) 위의 진짜 권력자 봉준호 감독까지, 17년째 끝없이 같은 궤도를 달리던 설국열차에서 내려온 그들이 편한 표정으로 만났다. 꼬리칸의 리더이자 봉기의 주인공이었던 크리스 에반스는 수염을 깎고 모자를 벗어 마치 청춘영화의 주인공처럼 카메라 앞에 섰고, 굵은 뿔테 안경과 무채색의 코트를 벗어던진 틸다 스윈튼은 우리에게 익숙한 그 창백한 매력을 뽐냈으며, 송강호 역시 오랜 파트너 봉준호 감독과 함께 그들을 안내했다. 봉 감독을 향한 그들의 애정은 변함없었다. “배우를 다루는 데는 타고난 감독”이라는 게 그들의 공통된 얘기였다. 봉 감독 또한 그들의 장점을 하나둘 열거하며 맞받아쳤다. 특별한 사전 협의 없이 공교롭게도 서로 비슷한 의상 컨셉으로 모이게 되자, “우리는 <맨 인 블랙>!”이라는 틸다 스윈튼의 얘기처럼 내내 화기애애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틸다 스윈튼] 누가 여자래요?

<설국열차> 제작진을 취재하러 모인 수많은 매체를 수용하기 위해 제작사가 한층을 통째로 인터뷰 룸으로 세내다시피한 호텔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지르다가 틸다 스윈튼이 킥 웃었다. “꼭 공항 보딩 게이트 같지 않아요? 저 문으로 들어가면 부산, 이 문으로 가면 서울로 날아가는 거예요.” 인터뷰 전날 입국한 틸다 스윈튼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설국열차>의 최종 편집본부터 시사했다. “크리스의 손에서도 커티스는 이미 흥미로운 인물이었지만 완성본을 보고나서야 <설국열차>가 리더십이라는 주제에 대해 얼마나 깊고 현대적이며 정치적인 탐구인지 알았어요.”

질서가 곧 생존이라고 또박또박 역설하는 <설국열차>의 메이슨 총리를 객석에서 바라보며, 나는 진보적 예술가로서 견해를 숨긴 적 없는 현실의 틸다 스윈튼이 메이슨의 논지를 말끝마다 반박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실없이 웃었다. 당신과 정반대인 여자를 연기하는 재미가 무엇이었냐고 묻자 그녀는 “누가 여자래요? 메이슨의 단발머리는 확실히 가발이고 다들 서(Sir.)라고 부르잖아요?”라며 찡긋한다. 성별의 경계 따위 지워버리는 이 배우의 마력은 <설국열차>도 예외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에게 메이슨의 캐릭터를 조각하는 과정은 정치 지도자들이 걸치는 가면을 디자인하는 작업이었다. “처음에는 엄청 과장된 캐릭터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메이슨이 머리를 시커멓게 염색한 히틀러나 카다피, 사담 후세인, 우리를 지금도 억압하고 있는 지도자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사실적인 인물임을 깨달았어요.” 그러면 영국 요크셔 악센트와 들창코를 메이슨의 특성으로 제안한 근거는 뭘까? “요크셔 억양의 사연은 사적인 거예요. 어린 시절 내가 권위란 이런 거다 경험한 특정 인물의 추억과 관련이 있죠. 아뇨, 전혀 혈연은 아녜요! ‘돼지코’는 늘 해보고 싶던 외양인데 (코를 누르며) 코가 이렇게 되면 즉각적으로 눈과 치아의 움직임에서도 어떤 성격이 나와요.”

한데 메이슨은 온갖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연약해 보이고 때로는 가련하다. 스윈튼은 끄덕였다. “메이슨이 ‘광대’라는 점은 우리에게 중요했어요. 대중은 메이슨처럼 허풍스럽고 미친 듯이 잔인한 정치 지도자들이 그래도 인간적이길 바란 나머지 우스갯거리로 만드는 경향이 있어요. 카다피나 <위대한 독재자>에서 채플린이 표현한 히틀러나 조지 부시의 우스꽝스러운 발언이 대중의 농담거리가 되는 풍경에는 나를 직접 해치지 않는 지도자들에게서 뭔가 귀여운 점을 발견하려는 인간의 충동이 들어 있어요. ‘귀엽다’는 봉 감독과 우리가 메이슨을 표현할 때 늘 쓰던 형용사였어요. 메이슨은 기차 시대 이전에는 보잘것없는 삶을 살았고 이것이 그가 처음으로 맛본 권력이라고 상상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진정한 권력이 아니라 가짜인 거죠. 한편 메이슨이 생활하는 객실의 닫힌 문 뒤에서 일어나는 일도 우리의 놀잇감이었어요. 맞아요. 미스 마플처럼 뜨개질을 한다거나 벽에는 클리프 리처드나 저스틴 비버의 브로마이드를 붙여놓았다거나. (웃음)”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에 워낙 친숙했던 스윈튼은 <설국열차>를 포함한 봉준호 영화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2년 전 첫 만남에서 편안한 공감대로 작용했다고 기억했다. “나는 봉 감독의 급진적 관점뿐 아니라 논리적이면서도 로맨틱한 그의 비관주의를 사랑했어요.”

영화에서 내가 본 틸다 스윈튼은 신성과 인간성, 여성과 남성, 현실과 판타지를 가볍게 아우르는 특별한 육체와 정신의 예술가였다. 이 모든 묘사는 아름답지만 대단히 추상적이다. 그래서 직접 대면한 짧은 대화에서도 똑같은, 아니 상통하면서도 더 큰 감흥을 느끼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스윈튼은 모두를 배려하면서도 애쓰는 티가 보이지 않았고 차 한잔을 권하듯 자연스럽게 영감과 위안을 주었다. ‘완성된 인간, 해방된 인간’이라는 말이 설핏 머리를 스쳤다. 혹시나 싶은 욕심으로 못다 한 질문을 이메일로 보내면서 수신인의 이름 앞에 Mrs.나 Ms.를 어쩐지 붙일 수 없었다. 성별에 특화된 그 타이틀들은 이 희귀한 사람을 실체보다 앙상한 존재로 가둬버리는 부당한 제한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김혜리


[크리스 에반스] 나는 직진한다

<설국열차>에서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바글대는 빈민굴 같은 맨 뒤쪽 꼬리칸, 그곳의 젊은 지도자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긴 세월 준비해온 폭동을 일으킨다. 기차의 심장인 엔진을 장악하고 절대권력자 윌포드를 굴복시켜 마침내 기차 전체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다. 하지만 열차칸의 문을 하나하나 열 때마다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그를 기다린다. 플래시백도 없이 오직 직진만 거듭하는 이 게임과도 같은 영화에서 크리스 에반스는 뒤돌아보지 않는 불굴의 주인공이다. 이에 대해 그는 ‘모두가 자기 하나만을 쳐다보고 있다는 숙명’이 중요하다고 했다. “권력에 대한 욕구와 모두를 돌보고자 하는 자애로운 마음, 그리고 과거로부터 비롯된 죄책감과 수치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복합적인 인물이지만 약한 모습을 절대 내비칠 수 없는 고단한 리더의 운명”이 바로 그가 얘기하는 커티스의 핵심이다.

이쯤에서 그가 연기한 수많은 슈퍼히어로 캐릭터들이 스쳐 지나간다. 먼저 <설국열차>에서 ‘불’이 필요한 절체절명의 순간, 그의 팬들이라면 <판타스틱4>(2005)를 떠올렸을 것이다. 속편인 <판타스틱4: 실버 서퍼의 위협>(2007)에 이르기까지 그는 자유자재로 불을 다루는 ‘불꽃 남자’ 자니 스톰이었다. 화려한 불길과 함께 하늘을 날던 캐릭터였으니 설국열차의 닫힌 문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도끼와 망치를 들고 복면을 쓴 수십명의 적들이 난데없이 등장했을 때도 <퍼스트 어벤져>(2011)와 <어벤져스>(2012)의 슈퍼 솔저 ‘캡틴 아메리카’였다면 ‘히드라’ 조직원들을 주먹과 방패로 박살내듯 쓸어버렸을 것이다. 홍콩을 배경으로 했던 <푸시>(2009)에서도 손을 대지 않고 물건을 움직이는 염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처럼 주요 필모그래피의 절반 가까이에서 이른바 ‘초능력자’로 등장하는 배우가 있을까 싶다. 슈퍼히어로 코믹스보다는 <톰과 제리>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던 소년의 미래가 이러할 것이라고는 그 역시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설국열차>에서는 불(<판타스틱4>)과 방패(<퍼스트 어벤져>)를 버리고, 철저히 ‘불완전한 개인’이 되는 것이 중요했다. 말하자면 <설국열차>에 이르러서야 그는 비로소 ‘사람’이 됐다. 실제로 그는 현장에서 “난 슈퍼히어로가 아니다. 난 철저히 인간이다”라며 마인드컨트롤을 거듭했다. 엔진으로 향하면서 겪게 되는 피로와 무력감은 ‘직진’과 ‘실시간’이라는 <설국열차>의 드라마에서 무척 중요하다. 당연히 애초의 투쟁심도 옅어지기 시작한다. 동시에 과거 기차에서 벌어졌던 몇번의 굵직한 봉기의 순간,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실패의 기억이 엄습해온다. 바로 그런 순간에 윌포드의 유혹과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이 지나온 열차칸을 되돌아보게 된다. “커티스는 지금껏 내가 연기한 인물들 중 가장 어두운 캐릭터다. <설국열차>는 내가 배우로서 어떤 ‘심연’을 경험한 작품이다.” 그래서일까, 인터뷰 내내 그가 즐겨 사용한 단어는 ‘particular’다. 감독에 대해, 영화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계속 빠지지 않는 단어였다. 그만큼 <설국열차>는 그에게 ‘특별한’ 영화로 남았다.

크리스 에반스의 최근 행로는 무척 흥미롭다. 1981년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나 이른바 ‘엄친아’스러운 길을 걸어왔던 그는, 연기자가 되기 위해 돌연 뉴욕으로 떠났다. 이후 단역과 조연을 오가며 그 스스로 말하길 ‘창피하고 끔찍한 몇몇 작품들’을 거친 다음 <판타스틱4>와 <선샤인>(2007) 등을 통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 그 달라진 위상의 키워드가 ‘캡틴 아메리카’였다면 이제 그는 <설국열차>를 전후로 변신을 꿈꾸고 있다. <펑처>(2011)의 마약 중독 변호사에 이어 <아이스맨>(2012)에서 악명 높은 실존 킬러 리처드 커클린스키(마이클 섀넌)의 동료 킬러, 그리고 <설국열차>가 바로 그것이다. 게다가 그는 곧 연출에도 도전한다. 흥미롭게도 “두 남녀가 기차에서 만나 밤새 뉴욕을 돌아다니는, <비포 선라이즈>(1995)의 뉴욕 버전 같은 영화”다. 현재 출연 중인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저>를 마무리 짓고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갈 예정이다. 그의 직진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주성철


[송강호] 긴장과 이완으로 무장해제

“나에게 봉준호는 영화적 동지이자 존경하는 감독이고, 사적으로는 친한 후배다.” 봉준호 감독에 대한 송강호의 가슴 뭉클한 정의다.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에 이어 <설국열차>에 탑승한 그는 빙하기만큼이나 길었던 4년의 프리 프로덕션 기간을 쭉 지켜본 파트너다. “<살인의 추억> 때부터 그랬는데, 봉준호 감독과 나는 말을 그렇게 많이 안 한다. 왜 내가 여기 나와야 하고, 왜 나는 다른 배우들처럼 영어가 아닌 한국어를 써야 하고, 이런 데 대해서 서로 말이 없다. 물어보기도 귀찮고, 봉준호도 ‘뭐 그런 걸 물어봐, 알아서 하지’ 이런 시스템으로 서로 일해왔다. 봉준호는 내가 어떻게 하나 볼 뿐이고, 나는 또 그렇게 내 마음대로 해도 되니까. (웃음)” <설국열차>에 따라붙는 거창한 수식보다 그는 봉준호 감독과의 세 번째 작업에 의미를 더 부여한다.

<설국열차>에서 송강호는 키플레이어다. 바로 영원을 달리는 기차, 설국열차의 설계자이도 하고 또 그 기차 안의 헤게모니에 정면으로 맞서는 핵심 역할이다. 남궁민수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의 발걸음에는 늘 의문이 함께한다. 그가 언제 어떻게 기차를 설계했는지, 왜 이곳에서 오랫동안 수감자로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어떤 확연한 단서도 제공되지 않는다. 꼬리칸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엔진칸으로 진격하려는 커티스(크리스 에반스)와는 어찌보면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표면적으로 그는 마약 대용품인 크로놀을 탐하는 의욕 없는 인간이자, 지켜야 할 건 (<괴물>에서 끝내 지키지 못했던) 딸(고아성)뿐인 미스터리한 인물이기도 하다. “남궁민수는 열차 안에서 이상론을 펼치는 유일한 인물이다. 개인적으로는 철학적인 세계관을 좀더 펼쳤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영화의 색깔이 달라졌을 거다. 밸런스 면에서 볼 때 봉준호 감독이 잘한 것 같다.” 오롯이 ‘송강호의 활약’을 기대한 관객의 허기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는 설국열차에 오른 한명의 탑승원에만 머무른다. “장면의 주인공으로 나온 건 두번밖에 없다. 첫 등장과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그런데도 회차는 꽤 된다. 총 72회차를 찍었는데 42회차에 참여했더라. 틸다 스윈튼이 말할 때 크리스 에반스와 같이 있으니까. 그들이 걸어갈 때 걸리고, 뒤에 있다 머리 걸리고, 이런 식이다. (웃음)”

유일하게 한국말로만 대화를 하고, 시종 나른한 자세로 의뭉스런 품새를 풍기는 남궁민수는 설국열차의 다른 인물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연기를 선보인다. 어쩌면 봉준호 감독이 유일하게 장르영화 안에서 ‘자유권’을 허용해준 캐릭터가 아닐까 싶은, 도드라지는 연기다. “그게 봉준호 감독이 나를 캐스팅한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설국열차 안의 분위기를 무장해제시키는 그런 역할이 필요했던 거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른 역할들을 통해서 하고 있지만, 영화적인 긴장과 이완을 시켜줄 존재인 거다.” 할리우드 시스템으로 짜여진 <설국열차>의 촬영에서 남궁민수의 연기는 그래서 되짚어볼 구석이 있다. “첫날 리딩을 하는데, 모두 그 긴 대사를 다 외워왔더라. 리딩 때 이미 감정의 70%는 다 내는 거다. 대규모 자본 안에서 타이트하게 현장이 운용되니, 카메라 슛 들어가는 순간 베스트 액션이 나와야 한다. 철저한 프리 프로덕션과 합리적인 현장운용이 낳은 연기 스타일이더라. 그 친구들한테 배운 점이 많다.”

남궁민수의 자연스런 연기는 이 ‘삼엄한’ 시스템에서 나온 변종 스타일이다. “크리스 에반스랑 서로 독백하는 장면에서 난 이중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 대사를 외워봤자, 분명 봉준호가 바꿀 거다. 항상 순식간에 대사를 바꾼다. 외웠다고 안심을 할 수도 없고, 소용도 없다. 하물며 이번엔 외국 배우들한테는 그게 안되니, 나한테는 물 만난 거다. (웃음)” 봉준호 감독과 십년을 함께한 송강호는 “그럼에도 난 단련이 돼 있으니까, 봉준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니까 대비를 했다”며 여유를 드러낸다. “나는 이 영화를 <살인의 추억>과 <괴물>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봤다. 사회의 단면을 드러내던 봉준호가 이제 존재론적인 관점으로 이야기를 확장했다. 흥행이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작품이 진일보하고 있다는 데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봉준호의 어퍼컷이다. 함께하게 되어 정말 의미있는 경험이었다.”

이화정


[봉준호] 엔진을 움켜쥔 사나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감독으로서 자기 영화의 배우들을 향해 ‘환상의 조합’이라 부르는 건 너무 당연한 인사치레 같지만, 지금도 봉준호 감독은 <설국열차>의 배우들을 ‘꿈의 캐스팅’이라 느낀다. 한정된 세트에서 거의 100% 촬영하다보니 그의 이전 영화들에 비해 로케이션의 다채로운 재미가 대폭 줄었지만, 매 순간 자신의 개인기를 유감없이 펼치고 사라지는 크고 작은 배우들의 매력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만큼 그에게 <설국열차>는 ‘배우의 맛’으로 버틸 수 있었던 영화다.

먼저 봉준호 감독의 헤어스타일을 두고 장난스럽게 “그레이트 헤어!”라 명명한 크리스 에반스는, <살인의 추억>(2003)과 <마더>(2009)를 챙겨보고 분석하며 <설국열차> 오디션에 적극적으로 응한 배우다. 사실 봉준호 감독에게 그의 첫인상은 ‘몸 좋은 미국 고등학생’이었지만 만남을 거듭할수록 반전의 매력을 느꼈다. 특히 인상적인 작품은 그가 마약에 찌든 변호사로 나온 <펑처>(2011)였다. 영화에서 변호사의 능력과 사생활이 별개로 굴러가는 그는 그야말로 제멋대로 살아가는 남자였다. 아내는 지긋지긋한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천장에 총 세례를 퍼부으며 이별을 고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퍼스트 어벤져>(2011)의 인간적인 슈퍼히어로 정도로 기억한 배우였는데 <선샤인>이나 <펑처>에서 의외의 모습을 봤다. 캡틴 아메리카로 이미 뜬 사람이 <펑처> 같은 인디영화에 출연했다는 것부터가 신선했다. (웃음) 영화마다 그 스펙트럼이 무척 넓다고 느꼈고, 열차칸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하는 커티스의 모습에 잘 들어맞았다”는 게 봉준호 감독의 얘기다.

<설국열차> 제작 초기부터 틸다 스윈튼은 요즘 흔한 말로 ‘신의 한수’로 여겨졌다. 언제나 밀랍인형 같은 창백한 매력을 뽐낸 그의 획기적인 변신만으로도 <설국열차>의 중반 분위기를 지배한다. “틸다가 연기한 메이슨은 순전히 그녀 자신의 의지로 빚어낸 캐릭터다. 이제껏 보여주지 않은 외양의 변화부터 불타는 출세욕과 과거의 신분을 은근히 드러내는 사투리 연기까지, 단지 외모의 변화만으로 ‘대배우’라는 얘기를 듣는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게 봉준호 감독의 얘기다. 그를 향한 틸다 스윈튼의 무한한 신뢰도 사실 이제는 좀 새삼스러울 정도다. “예술에 있어 내가 외국 누군가의 작품에 출연했다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저 예술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봉준호 감독과 크리스 에반스는 나의 새로운 가족이고, 봉준호는 힘든 촬영을 무사히 이끌어온 가장이다. 그런데 좀 어린아이 같은 구석이 있는 가장이다. (웃음)”

봉준호 감독의 얘기에 따르면 송강호가 연기한 남궁민수는 ‘<스타워즈>의 한 솔로’ 혹은 ‘<미래소년 코난>의 다이스 선장’ 같은 인물이다. 영화가 시작하고 거의 30분이 돼서야 등장하는 열차 설계자인 그는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인물들에게 더 큰 혼란을 안겨준다. 느닷없이 한국어로 주절주절 얘기하기 때문이다. 그가 의도한 것은 한국어가 등장하는 데서 오는 ‘재미’ 같은 것이 아니라 느닷없는 충격이나 이질감을 원했기 때문이다. 커티스로 하여금 과연 이 사람과 이 여정을 함께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을 동반한 괴리감 말이다. 그로서는 송강호를 그야말로 잔인하게 툭 던져놓은 것이다. 물론 그것은 오래도록 함께한 파트너십이 있기에 가능했다. “송강호 선배는 어떤 작품이든 본인만의 해석법이 있다. 그걸 늘 존경했고 거기에 전율할 때가 있었다”는 게 그의 얘기다.

물론 함께하지 못한 다른 많은 배우들에 대한 칭찬도 잊지 않았다. 엔진실에 버티고 선 모습만으로도 존재감을 느끼게 해준 에드 해리스는 클라이맥스의 섬세한 흐름을 완벽하게 공유한 배우였고, “역시 자식 잃은 부모의 한이 초능력을 발휘하게 한다”는 얘기처럼 옥타비아 스펜서는 예기치 않은 놀라운 액션 실력으로 예기치 않은 신 스틸러가 됐고, “임신한 여자 선생님이면 좋겠다는 고아성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교실칸의 알리슨 필은 의외의 충격을 줬으며, 이제 곧 애 아빠가 됨에도 불구하고 제이미 벨은 촬영현장의 귀여움을 독차지한 마스코트였다. 그처럼 느긋하게 배우들의 매력을 느껴보라는 것이 봉준호 감독의 마지막 주문이었다.

주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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