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영화·애니

한국 첩보물은 왜 하나같이 공허할까

등록 2013-08-29 19:39수정 2013-08-29 20:40

[문화‘랑’] 듀나의 영화 불평
‘스파이’ 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제임스 본드라는 이름이다. 현실세계의 스파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짓만 골라서 하며 지구를 정복하려는 악당들을 때려잡는 이 불한당의 존재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스파이 문학과 영화가 흥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언 플레밍의 창조물과는 달리 현실세계의 첩보전을 반영하는 사실적인 소설을 쓴다고 알려진 작가들 역시 플레밍과 제임스 본드의 덕을 본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작가 존 러카레이의 책들도 경력 초기엔 ‘지성인의 007’이라는 광고 카피를 달고 나와야 했다.

제임스 본드의 사실성을 무시하면 곤란하다. 그가 실제 스파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짓만 골라서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언 플레밍이 만들어낸 제임스 본드의 판타지는 작가의 실제 첩보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영화를 보면 놓치기 쉽지만 플레밍의 소설들에는 그런 판타지를 지탱해 줄 수 있는 사실적인 냉전시대의 묘사가 예상외로 많이 숨어 있다. 오로지 판타지만이었다면 제임스 본드는 공허했을 것이다.

대부분 첩보물 독자나 관객들은 제임스 본드의 판타지나 조지 스마일리의 드라마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 안다. MI6나 시아이에이(CIA), 모사드, 케이지비(KGB)는 모두 자기만의 굴욕과 영광의 역사가 있으며 이들 장르의 애호가들은 이 실제 역사에 그들이 읽거나 보는 작품을 투영한다. 그들에게 이 기관들은 실제 캐릭터나 마찬가지이다. 이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 독자나 관객들도 작가들이 이들 이름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절대로 버릴 수 없는 역사의 무게이다.

막 <스파이>라는 영화의 시사회를 보고 왔다. 이명세가 <미스터 K>라는 제목으로 만들다가 해고되고 이승준 감독에게 넘어가 <협상종결자>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지다가 지금 제목으로 안착한 설경구, 문소리 주연의 첩보코미디다. 남편이 스파이라는 걸 모르는 아내 이야기이니, 내용은 딱 <토탈 라이즈/트루 라이즈>인데, 간담회에서 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정식 리메이크는 아닌 모양이다.

영화를 보면서 기존의 한국 첩보물에서 느꼈던 불만이 다시 기어올라왔다. 이 영화의 국정원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어떤 역사를 갖고 있고 어떤 사람들의 지휘를 받으며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가? 답은 없다는 것이다. 한국 첩보물에서 국정원은 역사나 현실감 없이 오로지 기능만으로만 존재한다. 캐나다처럼 별다른 부침 없는 나라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아직까지 냉전시대에서 전투를 치르고 몇십년 동안 군부독재를 거쳤던 나라의 첩보조직이 조선시대 새색시처럼 역사적 순결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코미디라고 해서 불만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아까 판타지라고 했던 제임스 본드만 해도 꾸준히 현대 첩보 역사의 흐름을 삼키고 있다. 영국 관객들이라면 주디 덴치가 연기했던 엠(M)을 MI5의 첫번째 여성 디렉터였던 스텔라 리밍턴과 연결시키지 않았을까? 장르 안 어딘가에서 현실을 삼키지 않으면 판타지도 온전치 못하다. 그런데 한국 첩보물은 <베를린>처럼 어느 사실주의를 추구하는 영화에서도 국정원 자체는 역사를 제거한 탈색된 조직으로 남겨둔다.

이러니 한국 첩보물의 공허함은 계속 방치된다. 수많은 드라마와 농담의 기회는 사라지고 캐릭터는 오로지 장르 안에 남아 007 짝퉁들의 복사품이 된다. 이 맥빠진 상황은 누군가 컴퓨터 앞에 붙어 인터넷 게시판에 악플을 다는 국정원 직원들을 그리기 전까지 계속될 것이다.

듀나 칼럼니스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