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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우리 선희]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미로

등록 2013-09-09 15:28수정 2013-09-09 15:31

커버스타
“우리, 메이크업 받고 같이 촬영하는 거 이번이 처음이다. 그렇지?” <씨네21> 표지 촬영 현장에 들어선 <우리 선희>의 두 배우, 이선균과 정유미가 재미있어한다. 두 사람은 <첩첩산중>과 <옥희의 영화>, <우리 선희>까지 홍상수 감독의 세 영화에서 호흡을 맞췄다. 다른 드라마나 영화 현장에서 만났다면 지금과는 다른 관계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고 이선균이 말한다. “장르적으로나 캐릭터적으로나, 본연의 모습을 감출 수 있는 보호막이 없는” 홍상수 감독의 현장에서 모든 배우들은 “자연스럽고, 꾸밈없고, 편한” 모습으로 서로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보니 정해진 컨셉과 설정이 있는 촬영과 만남이 두 배우에겐 오히려 어색하면서도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 같다. 세편의 영화에서 연인 사이로 호흡을 맞춘 그들이지만, 프레임 바깥에서 이선균은 정유미에게 “말 없이 곁에 서 있어도 안심이 되는” 선배고, 정유미는 이선균에게 “<우리 선희>의 선희처럼 똑똑하고, 끼 많고, 용감한” 후배다. 가을의 이미지로 만연한 <우리 선희>의 개봉(9월12일)을 앞둔 어느 늦여름 오후, 영화 속 선희와 문수의 모습과 비슷하고도 또 다른 그들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글 : 씨네21 취재팀 | 사진 : 손홍주 |


[정유미] 정유미라는 질문 오늘이라는 대답
선희 역의 정유미

가볍게 던진 질문에 한참을 고민한다.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는가 싶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잘 모르겠어요’. 처음엔 자신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좀처럼 드러내고 싶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홍상수 감독의 <우리 선희>에서 선희로 분한 정유미는 선희처럼 모두의 눈길을 잡아끌고, 선희처럼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선희처럼 알 수 없다. 그녀를 설명하려는 말은 차고 넘치지만 그 어떤 것도 없는 미로에 빠진 기분. 몇번의 대화가 오가고 미로를 헤맨 끝에 겨우 실타래 한쪽 끝이 잡힌다. ‘모르겠다’는 대답이야말로 최선을 다한 진심의 형태다.

<우리 선희>에는 선희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나온다. 선희는 어떤 아이니. 내성적이고 자기표현을 잘 하지 않지만 똑똑하고 똘기도 있는 용감한 친구. 마무리는 항상 착하고 예쁘다로 끝나는 두루뭉술한 답변. 이 모든 표현들은 정확히 선희를 묘사하고 있지만 동시에 선희를 완벽하게 오해하도록 만든다. 단어의 조각들이 만들어낸 이미지 속에 나의 선희, 너의 선희, 우리의 선희가 있다. “선희를 궁금해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말들을 설명하려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그런 경험 다들 있잖아요.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은 말을 자기 생각처럼 이야기하고 그 말이 다시 입에서 입으로 떠돌다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그런 상황들이 재미있었어요. 농담과 말을 통해 보이는 사람들의 관계랄까.” 배우 정유미를 둘러싼 말들도 대체로 이와 다르지 않다. 일부는 사실, 일부는 이미지, 때로는 캐릭터, 때로는 진심. 조각난 말들이 사람들의 사이를 떠돌며 오늘의 정유미를 만들어왔다.

데뷔 9년차.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의 수줍은 소녀로 출발해 <사랑니>(2005), <가족의 탄생>(2006), <차우>(2009) 등 호평받은 영화에서 인상적인 캐릭터를 선보였고 <내 깡패 같은 애인>(2010)을 통해 88만원 세대의 얼굴로 거듭났다. 몇편의 드라마를 통해 단단하게 다져진 팬층을 확보했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8)부터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매번 출연하며 생각있는 배우의 이미지를 얻었다. 적지 않은 필모그래피에 나아가는 방향도 뚜렷해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배우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망설인다. “왜 이렇게 작품을 고르냐는 분들도 있지만 외부에 비친 이미지와 실제 들어오는 시나리오 사이엔 괴리가 있어요. 특별히 이런 걸 해야지 하고 목표로 하고 있는 건 아니고 그때그때 주어진 걸 제대로 해내려고 노력 중이에요. 사실 데뷔 연차에 비해 많은 작품을 한 것 같지도 않아요.”

신중하거나 겸손한 것과는 살짝 다르다. 그저 진심이다. 그녀는 특별히 장대한 목표를 세우고 달려나가는 사람이 아니다. 정해진 캐릭터, 일정, 틀에 자신을 맞추는 데도 서투르다. 대신 정유미의 연기는 기본적으로 ‘오늘’에 맺혀 있다. “시나리오를 완전히 이해하고 시작하진 않아요. 홍 감독님 영화는 애초에 그게 불가능하기도 하고요. 주어진 대사와 대략적인 상황만 가지고 자리에 앉으면 자연스럽게 만들어져요. 실제 나는 여기 와본 적도 없고 그런 일을 겪은 적도 없지만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죠. 그 순간들이 너무 좋아요.” 로베르 브레송이 말했던 것처럼 ‘그 순간 그 장소에서 허락된 유일한 연기’가 그녀에게 찾아온다고 해야 할까. 그 순간 그녀의 연기는 의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체험에 가깝다. 자연인 정유미의 경험이 연기에 녹아들어가는 게 아니라 선희라는 캐릭터가 거꾸로 그녀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이다. 그 순간을 직접 체험했기에 더욱 생기를 발하는 장면들.

“어떤 역할을 맡는 순간 나는 그 시간을 그렇게 산 거예요. 거기 그렇게 있었던 거죠. 살면서 매일매일이 기억되진 않잖아요. 근데 작품을 찍을 땐 어떤 몇달은 내가 거기 그렇게 있었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 그 시간에는 선희라는 이름으로 그 사람들과 함께했구나. 그런 순간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게 행운인 것 같아요.”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 그녀의 기억(이 된 연기)을 마주하고 그녀의 진심에 공감한다. 드라마 <직장의 신>의 정주리, 영화 <옥희의 영화>의 옥희, <우리 선희>의 선희와 정유미는 다르지만 적어도 작품에서만큼은 한결같이 거짓 없는 눈빛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알 수 없지만 좋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그녀. 알 수 없는 먼일을 염려하며 가능하지도 않을 계획에 정력을 허비하느라 정작 ‘오늘’을 놓치는 이들이 대부분인 요즘, 지금 이 순간을 연기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그녀는 이미 좋은 배우다.

글 : 송경원 | 사진 : 손홍주 |


[이선균] 때때로 진심 때때로 의심
문수 역의 이선균

“많은 일들이 반복되면서 또 어떤 차이를 가지는 이 인생이라는 게 뭔지는 끝내 알 수 없겠지만, 제 손으로 두 그림을 붙여놓고 보고 싶었습니다.”

<우리 선희>의 문수(이선균)를 보며 불현듯 <옥희의 영화>의 마지막 대사가 생각났다. 파리의 북한 유학생으로 분했던 <밤과낮>부터 영화과 대학원생으로 출연하는 <우리 선희>까지, 홍상수 감독의 다섯 영화에 출연한 이선균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을 따로 떼어 붙여놓고 보고 싶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들 영화에서 이선균은 대개 지식인이었으며 어떤 여인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비슷한 역할을 맡은 적이 있는 김태우, 김상경 등의 배우들과는 또 다르다. <옥희의 영화> 속 한 장면. 구애를 퍼붓는 진구(이선균)에게 옥희(정유미)는 “난 네가 착해서 좋아. 믿을 수가 있어”라고 말하는데, 그 말은 이선균이 진구를 연기하기 때문에 비로소 진심처럼 들린다. 젖먹던 힘을 다해 팔씨름으로 성남(김영호)을 이겨보려던 <밤과낮>의 경수처럼,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돌진하는 맹목적인 순수함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이선균에게서 종종 엿보인다. 버려야 할 것보다 얻고 싶은 것이 더 많고, 노련함보다 솔직함으로 승부하는 ‘젊은 남자’의 이미지가 그의 것이다.

어느 햇볕 좋은 가을날 우연히 옛 연인 선희(정유미)와 재회한 <우리 선희>의 문수는 일견 <옥희의 영화> 속 진구의 미래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보고 싶었던 전 여자친구에게 끝내 이별의 이유를 듣지 못하고, 좋아했던 선배가 냉담하게 대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저마다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우리 선희>의 인물들 중에서 문수는 솔직하고 용감하게 자기 생각을 말하며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지만, 그의 시도는 번번이 “나중에 얘기해줄게”라는 말에 가로막혀 좌절되고 미끄러진다. 귀엽고도 애처로운 문수의 모습을 보며 <첩첩산중>의 명우와 <옥희의 영화>의 진구를 떠올리는 이가 많을 것 같다. “모두 (정)유미와 함께 출연한 작품인데, 이름만 바뀌었지 둘 사이의 관계는 거의 똑같은 것 같다. 이번 영화에선 (정)재영이 형과 유미의 키스 신이 나오는데 그걸 보며 기분이 나빠지더라. (웃음) 난 늘 유미를 쫓아다니기만 했는데.” 그래서 이선균은 <우리 선희>의 문수를 연기하며 현장에서 홍상수 감독에게 투정 섞인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단다. “감독님, 저 유미 그만 쫓아다닐래요. 이제 학생 역할도 그만하면 안될까요.” “알았다, 앞으로는 너의 다른 결을 찾아줄게.”(홍상수 감독) 그런데 이 대화에서마저도 귀엽고 거침없는 문수의 모습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이선균이 <우리 선희>의 출연 제안을 받은 건, 드라마 <골든타임>을 마치고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골든타임>은 유독 몸과 마음이 힘든 작품이었다. 촬영하면서 불면증에 걸릴 정도였으니까. 그 작품을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홍 감독님의 전화를 받았기 때문에, 사실 감독님을 만나는 자리에 거절하려고 나갔었다. 하지만 회차도 많지 않았고(그는 <우리 선희>에 3회차 출연했다) 홍 감독님의 영화는 참여하고 나면 늘 즐거운 작업이 되기 때문에 결국 참여할 수밖에 없겠더라.” 이선균은 <우리 선희> 현장에 “놀러가는” 기분으로 나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곡해해선 안된다. “대본도, 준비 과정도 있을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짧은 시간 안에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어 살아 있는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더불어 “고정된 프레임 안에서 에너지와 극의 흐름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배우 이선균이 ‘노는’ 방식이다. 그 놀이 과정에는 언제나처럼 우연이 빚어낸 아름다운 순간도 포함되어 있다. “끝까지 파고, 파고, 파고 들어봐야 뭐가 중요한지 아는 거잖아요.” 최 교수(김상중)가 선희에게 말했고, 선희가 문수에게 전한 말을 자신의 것처럼 선배 재학(정재영)에게 얘기하는 문수의 모습은 15분간의 롱테이크 촬영 과정에서 “잠시 대사를 잊어버려 NG를 낼 위기에 처했지만” 배우 정재영과의 호흡을 끝까지 놓지 않은 이선균이 만들어낸, <우리 선희>의 인상적인 순간이다.

이선균은 지난해 가을에 촬영한 <우리 선희> 이후, 10년 만에 출연한 연극 <러브 러브 러브> 이외엔 다른 작품에 출연하지 않았다. 그동안 매년 두편 이상의 작품에 출연하며 쉴새없이 달려왔던 그에게도 잠시 숨고르기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조만간 촬영을 시작할 영화 <무덤까지 간다>에서 위기에 처한 형사 건수를 연기할 이선균은 길지 않은 휴식을 마치고 다시 신발끈을 질끈 동여매는 중이다. 그의 말대로 “일하면서 노는 게”, 이선균의 스타일이다.

글 : 장영엽 | 사진 : 손홍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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