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랑’] 듀나의 영화 불평
멀쩡한 정신을 가진 관객이 이준익의 <소원>을 냉담한 태도로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신나간 악당에게 무참하게 구타당하고 성폭행당한 초등학생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를 보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비슷한 이유로 이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과 보는 사람들은 모두 일종의 의무감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이런 이야기는 결코 오락용으로만 소모되어서는 안 된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건, 보는 사람이건 영화가 영화로만 그치지 않도록 무언가를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준익 역시 의무감을 짊어지고 있다. 그는 분노와 울분보다는 가족의 치유에 더 신경을 쓴 이야기를 만들려 한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피해자의 가족들이 영화를 보고 삶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의무감은 영화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이준익은 처음부터 ‘오퇴르’로 분류되는 영화감독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훌륭한 이야기꾼이었다. 하지만 <소원>에서는 그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장점이 그리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관객들을 꾸준히 자극하기는 하지만 좋은 이야기는 아니다.
이준익이 소재의 의무감에 묶여 어떤 종류의 모험도 하지 않는다. 그는 영화의 각본이 조금이라도 예술적인 날개를 펴는 것처럼 보이면 그 즉시 막아버린다. 그 결과 영화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통속적이 된다. 평균적인 한국 사람들이 이런 사건에 대해 들었을 경우 할 법한 반응만을 보여주고, 영화 속 사람들의 사고나 행동도 평균적인 한국인들이 상상하는 영역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 때문에 영화는 종종 인터넷 기사 댓글처럼 보인다. 주인공 소녀 소원의 성폭행범 묘사를 보라. 그리고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되는 재판 장면을 보자. 이 장면들은 오로지 관객들의 분노를 일으키기 위해 짜여졌다. 그 분노는 자연스럽다. 하지만 영화로 만들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소재로 택한 사람들이라면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허겁지겁 댓글을 다는 인터넷 사용자들이 볼 수 없었던 것,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짚어내며 피해자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길을 택할 수 있는지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것들이 절실하게 필요한 관객들에게 <소원>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설경구, 엄지원 그리고 훌륭한 아역배우인 이레가 절절한 연기를 보여주지만, 이야기 자체의 통속성이 배우들의 연기를 방해한다. 영화가 주인공들의 ‘치유’를 위해 도입한 코코몽을 보라. 거의 간접광고 수준인 이 시퀀스를 거치는 동안 난 코코몽과 친구들이 냉장고 나라에 사는 음식들이라는 몰랐던 사실을 배웠다. 하지만 아무리 설경구와 이레가 감동적으로 연기를 해도, 지나친 감상주의와 인공성 때문에 이 이야기는 의도했던 감동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소원>의 이야기는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할 부분에서 허겁지겁 끝이 난다. 클라이맥스의 재판이 끝났을 때 가족들의 분노는 최고조에 달한다. 당연히 여기서부터 치유의 과정이 시작되어야 한다. 하지만 다음 장면이 시작되었을 때 가족들은 어느 정도 상흔은 입은 상태에서 이미 일상으로 돌아와 있다. 실제 사건(들)을 숙제하듯 예의 바르게 재현하고 여기에 댓글을 달듯 평범한 주석을 붙이는 동안 정작 예술가가 진짜 역할을 해야 할 부분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듀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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