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림과 스밈
“연주는 삶이고, 삶은 연주라는 생각이 들어요.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화음을 맞추며 조화롭게 살다 볼륨이 줄어들듯 조용히 꺼져가는 삶을 살고싶네요. 이 영화를 보고나니 제가 예술가가 된 듯해요. 하하하.”
1일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만난 김인자(52·송파구 잠실동)씨는 영화 <마지막 4중주>를 3번이나 봤다고 했다. 이날은 4번째로 오랜만에 만난 여고동창생 3명과 함께 왔단다. <마지막 4중주>의 ‘작지만 강한 힘’을 증명하는 사례다.
7월 말 개봉한 예술영화 <마지막 4중주>가 57일만인 지난 추석 1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집계로는 1일까지 모두 10만4398명이 이 영화를 관람했다. 2009년 이후 소규모 개봉한 해외 예술영화 가운데 최다 관객수를 갱신한 기록이다. 이 영화의 흥행이 놀라운 것은 연중 최대 성수기인 여름방학 시즌에 개봉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대작 한국영화, 애니메이션 속에서 불과 27개관으로 시작해 이런 놀라운 성과를 이뤄냈다는 점이다.
영화는 25주년 기념공연을 앞둔 현악 4중주단 ‘푸가’의 첼리스트이자 리더인 피터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피터는 단원들에게 마지막 공연에서 40여분 동안 쉬지 않고 연주해야 하는 <베토벤 현악 4중주 14번>을 연주하자고 제안하고, 연습과정에서 스승과 제자, 부부, 삼각관계에 처했던 친구 등으로 엮인 네 사람의 억눌렸던 갈등이 폭발하게 된다.
이 영화가 예술영화로는 드물게 두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관객들의 사랑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영화가 20~30대 관객층이 많은데 견줘 이 영화는 40~50대 중년층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다. 아마도 영화의 주인공이 중년이라서 그런 듯 하다. 이인영(57)씨는 “음악가라는 직업적 배경이 특이할 뿐, 그 안을 들여다보면 중년 모두가 공감할만한 내용”이라며 “나를 둘러싼 관계들, 성공과 행복에 대해 돌아보는 계가가 됐다”고 말했다.
인생의 중년을 상징하는 듯한 뉴욕시의 쓸쓸한 느낌과 귀에 감기는 아름다운 클래식 선율도 인기요인으로 꼽힌다. 송효신(52)씨는 “요즘 영화는 폭력적이거나 너무 가벼운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배경과 음악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품위있는 영화”라며 “양념을 안 친 자연식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영화의 흥행 덕에 클래식 오에스티가 이례적으로 1000장 넘게 팔리고, 클래식 내한공연의 표가 동이 났다는 것이 괜한 말은 아닌 듯 싶다.
마지막으로 관객들이 꼽는 인기요인은 4중주 자체가 우리의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인생 자체가 혼자 연주하는 독주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화음을 맞춰가는 협주고, 그 안에서 부부관계, 친구관계, 가족관계는 늘 불협화음을 낼 수 있다. 그리고 그 불협화음을 극복해가는 과정이 바로 삶이라는 점을 영화는 조용하게 보여준다. 김인자씨는 “관계와 갈등의 문제는 물론 병에 걸린 피터의 모습을 보며 은퇴와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가짐까지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좋은 영화는 물량공세가 없어도, 호화로운 마케팅이 없어도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마지막 4중주>는 ‘조용하고 느린 방법’으로 증명해 냈다. 이 영화의 작은 돌풍이 시사하는 바가 큰 이유다.
유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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