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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한국 영화계의 거대한 ‘음봉’
‘19금 아트’ 봉만대 감독을 만나다

등록 2013-10-10 14:21수정 2013-10-10 14:26

봉만대 감독
봉만대 감독
‘에로 영화=저급한 B급 영화’라는 선입견은 유서 깊다. 1980년대 <애마부인> <뽕> <산딸기> 시리즈는 우리 눈에 짙은 색안경을 씌웠다. 동물적 본능과 희화화된 성행위로 가득 찬 이 영화들을 보고 있노라면, 상업성에 굴복한 ‘예술’ 앞에서 감독이 느꼈을 자괴감에 연민의 감정이 들 정도다.

봉만대. 그는 달랐다. ‘에로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달릴 정도로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1999년 영화 <도쿄 섹스피아>로 데뷔한 뒤 지금껏 20편 남짓 성인영화를 만들며 에로영화에 대한 이미지를 새로 구축해왔다. 충무로 진출 첫 상업영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2003)은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널리 각인시켰다. 에로영화 외길 인생(?)을 접을 만도 한데, ‘성’과 ‘성인영화’에 대한 탐구와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그 결과물이 꼭 10년 만에 <아티스트 봉만대>로 나왔다.

지금 그는 새로운 실험을 준비하고 있다. <애마부인> <뽕> <산딸기>를 넘어선 자신의 전작들마저 능가해, 상업성과 예술성을 모두 갖춘 또 다른 대표작이 될 것으로 기대해도 좋을까. 그의 ‘에로’는 지금도 진화 중이다.

[3차원 인터뷰] 손아람이 본 봉만대

에로로 위장한 예술의 속삭임

단 한마디조차 흘리기 아깝다. 바로 기록을 시작한다. 녹음기 버튼을 누르자마자 봉만대 감독은 “나 어제 팔뚝에 털이 많이 난 여자를 봤어”로 운을 뗐다.

곽현화 수북이? 섹시했어?

봉만대 섹시하더라. 털 많은 여자 좋아.

곽현화 나도 털 많은데.

봉만대 털 많은 여자가 잘하지.

이파니 털이 많으면 진화가 덜 된 거라 하더라. 그래서 동물적이래.

곽현화 어, 난 꼬리뼈도 퇴화가 덜 됐는데.

이파니 나도 꼬리뼈 길어. 만져봐. (엉덩이를 들어준다.)

곽현화 (만져보고) 어? 이건 꼬리뼈가 아니라 꼬리잖아!

봉만대 나도 한번만…. (슬쩍 만져보고) 이럴 수가.

이파니 난 동물적인 게 아니라 그냥 동물인가봐.

곽현화 그런데 감독님, 지금 내 꼬리뼈도 만져보고 싶죠?

<아티스트 봉만대>를 촬영하는 내내 이런 분위기였나?

봉만대 만나면 음담패설이었죠. 제일 잘하는 사람이… (눈치 보고) 파니! 의외로 성은이가 못하고.

성은 아, 대체 ‘의외’는 뭡니까!

봉만대 잘할 것 같잖아…. 현화는 너무 끝장 보는 애라 그냥 빼고요. 나랑 같이 있으면 얘들이 빗장을 푸나봐요. 아무래도 내 눈빛이 슬퍼 보이진 않잖아요.

곽현화 야해. 처음 봤을 때 소름 끼쳤어.

술자리가 아니라 인터뷰 자리다. 내뱉은 말은 어느 것이든 기록할 수 있으니 신중히 고르라고 경고했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는다. 금기와 싸워 영토를 쟁취하려는 혁명가들의 회의를 지켜보는 것 같다. 그러나 퇴폐적이지는 않다. 차라리 건강한 느낌이다. 들쑥날쑥 서로 다른 높이의 금기를 가진 세상에서 이들의 언어와 이들의 예술은 단지 ‘성인물’로 쉽게 분류돼버린다. 인터뷰 일정이 잡힌 뒤 찾아봤을 때도 <아티스트 봉만대>의 상영관은 심야 시간대로 모두 밀려나 있었다. 주변 영화인들에게 함께 보러 가자고 제안했지만 대체로 “에로영화는 굳이 보고 싶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티스트 봉만대> 심야로 같이 볼래?’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던 한 여성 영화인과는 아직까지 연락이 안 된다. 나는 이 영화를 혼자 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봉만대 감독과 왼쪽부터 곽현화, 이파니, 성은.
봉만대 감독과 왼쪽부터 곽현화, 이파니, 성은.
<아티스트 봉만대>는 에로영화가 아니었다. 작가로서 양심을 걸고 말한다. 단언컨대 이 영화는 올해 이 땅에 나온 가장 지적이고 세련된 코미디영화다. 한국 영화계에 거대한 두 봉우리가 있어 양봉은 봉준호이고 음봉은 봉만대라고 하는데, 올해 개봉한 양봉의 <설국열차>는 더 스마트하고 번뜩이지만 지적인 품위와 깊이에서는 음봉의 <아티스트 봉만대>에 미치지 못한다. 혹자는 봉만대를 ‘에로계의 봉준호’라고도 부른다. 단지 같은 봉씨 성을 받아 태어났단 이유로 이들의 작품 세계를 하나로 묶는다면 둘 모두에 대한 모독일 것이다. 전태일을 ‘노동계의 전두환’이라 부를 텐가? 굳이 빗대자면 봉만대는 ‘에로계의 홍상수’ ‘에로계의 우디 앨런’에 가깝다. 시선과 작법은 물론, 대사와 때깔에 기대지 않고 입이 없는 카메라만으로 품격을 드러낼 줄 아는 노련함까지 닮은 점이 많다. 어쩌면 시간이 지난 뒤 우리는 봉만대의 초기 에로영화를 떠올리며 우디 앨런의 조악한 초기 코미디영화와 같은 향수를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티스트 봉만대>를 관람하며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은 이것이었다.

대체 이런 어마어마한 재능을 가진 감독이 어쩌다 에로영화로 경력을 시작하게 됐는가?

봉만대 먼저, 오히려 제 관객에게 미안해요. 이번 영화는 에로가 아니라서요. 비슷한 질문을 자주 받아서 저도 거슬러 생각해봤습니다. 왜 에로영화를 찍게 됐는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처절하게 배신을 당하면 에로를 찍게 되나봅니다. 군대에서 휴가 나와 여자친구 집에 간 적이 있어요. 집 안에서 새어나오는 남녀의 웃음소리를 들었어요. 문을 여니 현관에 군화가 있고. 군화에 지퍼가 달려 있었죠. 지퍼 달린 군화는 장교만 신습니다. 군바리 대신 다른 군바리를 만난 겁니다. 그날 사랑의 판타지를 잃었어요. 그리고 나쁜 놈으로 변했고.

곽현화 아니, 배신을 당했다고 꼭 에로를 찍어야 하나?

봉만대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어. 사랑에 덧붙인 다른 모든 이야기들. ‘노력하고 싶지 않다’가 가장 정확한 말인 것 같아.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

이파니 치료를 받았어야지.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서 앞으로 나아갔어야 했는데.

곽현화 와이프는 그럼 뭐야.

봉만대 와이프랑은 일하면서 만난 친구일 뿐이었지. 그런데 털이 많았어!

곽현화 푸하. 나, 겨드랑이 제모 괜히 했나?

이파니 그거 자꾸 하면 겨드랑이에 땀 찬다던데?

봉만대 털은 뽑는 거 아냐. 다 이유가 있어 난다.

성은 에로영화를 찍어온 이유를 물었는데 왜 제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아티스트 봉만대>는 제작 현장에서 벌어지는 영화사·투자사·기획사·배우·스태프·감독의 이해관계 충돌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며 영화산업의 속감을 까뒤집어 보인다. 노골적인 풍자이지만 아무래도 현장의 독재자인 감독의 전횡에 대해서만큼은 자학 개그로 슬쩍 피해갔다는 느낌이 있다. 배우들은 어땠나? 봉만대 감독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면 이야기해달라.

곽현화 감독이 현장에서 예민하게 구는 부분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배우도 마찬가지로 스타일리스트한테 예민하게 굴거든요.

성은 감독님이 예민하긴 엄청나게 예민했어요. 마찰이 일어났을 때 배우가 설득되는 종류의 예민함이라 다행이었죠.

이파니 저는 이번이 첫 영화였어요. 지난 몇 년간 봉만대 감독과 알아오면서 굉장히 편하게 지냈는데, 현장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접하고 크게 당황했어요. 활동해오면서 이번 영화 일처럼 어려운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이게 이 사람 본모습이구나, 이게 영화판이구나, 정말 힘든 일이구나…’ 많은 생각이 들었죠. 불만도 트러블도 있었고요. 사실 그런 부분이 영화에 완벽하게 담기진 않았던 것 같아요.

배우로 출연한 임필성 감독이 영화사 대표에게 “요즘 유행처럼 감독 자를래? 나 감독조합에 고발할 거야!”라고 소리치며 촬영 도중 일을 때려치우는 장면이 나온다. 자본 권력이 감독의 연출 권리를 침습한 최근의 사건들을 꼬집는 부분인데, 정작 작가를 비롯한 스태프들은 감독의 연출 권력에 의해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당하거나 아예 잘려나가는 일을 관습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봉만대 대개 감독은 이기적이에요. 성격적 결함과 문제적 기질이 있죠. 철저히 자기 입장에서 생각할 줄밖에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곽현화 이기적이라는 데 동의. 독재자였지.

성은 하지만 어느 촬영장이든 감독은 많은 스태프와 배우를 통솔해야 해요. 오히려 독재에 소질 없는 감독의 현장에서 불만과 분란이 터져나오는 게 보통이에요. 봉 감독님 같은 경우에는 밀당에 능숙해서 상황을 잘 풀어나가는 편이라고 봐요. 불쾌하지 않은 독재랄까?

이파니 저는 솔직히 이렇게 느껴요. 우리 세 배우, 모두 말 잘 듣는 배우라 캐스팅한 게 아닐까?

봉만대 그건 아냐. 절대로 그렇지 않았어!

이택광 교수가 <아티스트 봉만대>의 촬영과 편집이 마치 버라이어티 예능 프로그램을 떠올리게 한다고 지적했다.

봉만대 맞아요. ‘방목형 앵글’이라고 할 수 있죠. 영화 안뿐만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우리 안에도 리얼리티가 존재해요. 이야기는 물론 촬영 자체도 ‘솔까말’(솔직히 까놓고 말해)로 해보자는 의도였어요.

성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요. 두 번 가게 된 장면은 대사가 다 달라요. 어떻게 나올지 우리도 몰랐죠.

봉만대 천재만 할 수 있는 방법이지, 하하. 숙성 없는 날것으로 촬영하고 싶었어요. 거칠게 대패질한 것처럼 편집하려 했고요.

성은 이런 적이 있어요. 감독님이 현화에게 다리를 벌리라고 요구하다 충돌하는 장면이 있는데, 촬영하다보니 분위기가 정말 심각해져버렸어요. 수영장에서 현화가 탄 튜브를 감독님이 발로 차버렸고, 현화는 수영장 가운데로 떠밀려가 발버둥치며 저에게 ‘잡아달라’고 소리치는데 웃음이 터질 것 같더라고요. 돌아보니까 감독님은 귀까지 빨개져서 폭발하기 직전인데 제가 웃어서 다시 찍으면 절대로 그런 연기가 못 나올 것 같았어요. 그래서 장면을 살리려고 제가 슬쩍 뒤돌아 프레임 바깥으로 빠져버렸어요. (영화에서 이 장면은 성은이 곽현화와 봉만대 사이 권력 전선에서 고민하는 듯한 모습으로 절묘하게 표현됐다.)

곽현화 슛 전에 굵은 상황 설정 하나만 받았던 거죠. 예를 들어 그 장면에선 (대사가) “벌려”가 다였어요.

홍상수 감독 역시 구체적인 콘티 없이 촬영에 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홍상수 영화가 상당히 정적인 반면 <아티스트 봉만대>는 배우들의 동선과 액션이 크고 자연스러워 마치 완벽하게 짠 콘티를 따라 연기한 것처럼 보인다. 지금 나누는 대화를 지켜보니 배우들의 케미컬이 훌륭했던 덕분이 아닌가 한다.

봉만대 일단 이 친구들이 굉장히 똑똑해요. 한 사람이라도 바보라 눈치가 늦거나 예능 기질이 없었다면 버틸 수 없었을 거예요. 예능처럼 가장 관심받고 싶은 사람이 프레임 안에서 앞장설 수 있었으니까요. 교활하게 연기해야 했어요. 연출자로서 저는 싸움을 부추겼고요.

이파니 감독님이 복 받았죠. 여자 연예인을 많이 봐왔지만 한데 모아놨을 때 이렇게 아무 트러블도 일어나지 않은 경우는 드물어요.

확실히 세 배우 모두 정신이 건강해 보인다. 몸이 건강하다는 사실이야 이미 온 세상이 알고 있는 바이고. 그런데 영화사와 투자사를 어떻게 설득했는가? 콘티도 없는 영화에 제작비를 덥석 내놓았나?

봉만대 일단 영화사 쪽에서 먼저 저랑 일을 하고 싶어 했어요. ‘내가 겪은 실제 현장 이야기를 해보자’고 제안했지요. 사진가가 섹시 화보 때문에 배우를 빼돌려간 사건처럼. (영화에 실제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관객이 진짜 궁금해하는 부분을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자고요. 영화 촬영은 하나의 잔치이자 소동에 가까운 느낌이거든요. 그래서 콘셉트는 하나였어요. 칠순 잔치.

성은은 단 한 번 찍은 노출 영화 때문에 아직까지도 ‘에로배우’ 딱지를 떼지 못했다. 이파니는 ‘플레이보이 모델’, 곽현화는 ‘섹시 개그우먼’, 봉만대는 ‘에로영화 감독’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영화 안에서 각자의 콤플렉스를 오히려 강력한 갈등 요소로 활용했는데, 다만 이파니의 경우에는 부여된 에피소드와 캐릭터가 좀 밋밋한 느낌이다. 모험이 필요 없지만 도전할 가치도 작았던 배역이 아니었나?

이파니 오랫동안 알아온 사이라 감독님께서 저를 특별히 더 배려했던 부분이 있어요. 사실 제 스토리와 관련된 부분도 다 촬영은 했는데 감독님이 편집을 했어요.

봉만대 감독이기 전에 사람으로서 배우에게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파니는 생후 3개월인 아이가 있고 산후조리도 해야 하는데 몸이 엉망인 상태였어요. 이혼과 재혼으로 대중의 입에 오르기도 했죠. 보호하고 싶었습니다. “이파니가 분량이 적네?”라고 묻는다면, “네가 이파니한테 기대하는 것이 뭘까?”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이파니 사실 더 중요한 게 있죠. 감독님이 제가 또 이혼할까봐 걱정을 많이 했어요.

봉만대 어차피 가죽은 늙는 거예요.

여배우들 뭐라고?

봉만대 관객에게 우리 배우들의 ‘섹시 콘셉트’가 아니라, 그 콘셉트를 만족시키려면 감내해야 하는 인간적이고 내적인 고충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배우로서의 길을 모색하도록 돕는 게 이 영화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특히 성은이는 오기로라도 잡고 싶었어요. 성은이 출연하면 자기는 출연하지 않겠다는 배우들이 있었거든요.

성은 너지?

곽현화 아, 아니야.

봉만대 그런 배우는 내가 먼저 쳐냈어. 자기 위치도 제대로 못 보면서 우리 그룹을 이상한 시선으로 봤던 거지.

성은 누구냐니까?

그러나 한편으로, <아티스트 봉만대>에서 성은의 노출은 이 영화가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지점에서 자기모순을 범하는 것 같아 불편했던 면이 있다. ‘노출이 굳이 필요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주제로 보나 톤으로 보나 노출 없이도 충분히 이야기를 끌고 갈 수 있었을 텐데. 이 이야기는 노출 장면을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관객을 완전히 배신했을 때 오히려 최대의 효과를 거두지 않았을까?

성은 글쎄요. 저는 반드시 필요한 노출이었다고 생각해요. 억지로 찍지는 않았어요. 이야기 안에서, 어려서 노출 한 번 했던 것 때문에 10년 동안 시달려왔던 제가 촬영 중단을 막기 위해 다시 가슴을 드러내야만 하는 장면이었잖아요. 야한 장면이 아니라 슬픈 장면이었고, 영화의 가장 중요한 대목이었다고 봐요.

곽현화 우리 어머니도 극장에서 제 노출 장면을 보고 짠했다고 하더라고요. “현화가 주는 돈 함부로 쓰면 안 돼. 어떻게 번 돈인지 알아?” 아버지께 그렇게 말했다 하시던데.

이파니 나도 앞으로 그 말 꼭 딸한테 써먹어야겠다.

곽현화 파니는 진짜 즐겁게 일해요. 파니 딸은 즐겁게 분유 퍼먹어도 됩니다.

에로, 노출, 섹시 콘셉트라는 꼬리표는 이미지의 족쇄로 작용하기도 할 터다. 부담은 없는가?

곽현화 저 같은 경우에는 ‘섹시 개그우먼’이라는 타이틀이 정말 좋아요. 오히려 타이틀에 걸맞게 활동하지 못해 민망하죠. ‘개그우먼’이라는 단어에 제가 미치지 못했어요. 안영미 선배는 정말 섹시한 개그로 웃기잖아요.

봉만대 그건 네가 너무 섹시해서 그래.

곽현화 그럴지도. 하하! 제가 <개그콘서트> 무대에 나갈 때면 객석의 긴장된 공기가 느껴졌어요. 직전 코너에까지 편하게 풀어져 있던 관객이 경직된 표정으로 뭔가 다른 걸 기대하는 느낌을 받아요. 그럼 바로 이런 생각이 들죠. 아, 내가 여기서 망가져봐야 사람들이 웃지 않겠구나. 호흡과 타이밍이 엉켜서 준비한 걸 못 보여주곤 했어요. <개그콘서트>에서 빗장 풀고 망가져보지 못한 게 정말 한이에요.

이파니 저도 어릴 때는 ‘섹시’ 타이틀이 너무 싫었어요. 왜 나는 저런 타이틀을 가지고 있을까. 왜 항상 예쁜 옷을 입고 예쁜 척해야만 할까. 그러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제 모습을 스스로 좋아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이제 아예 섹시함으로 선빵을 치죠.

성은 저는 좀 달라요.

이파니 성은이는 놀랄 만큼 보수적이죠.

성은 성인이 되어 결과를 감당할 능력을 가진 상태로 노출을 하겠다고 판단한 게 아니었어요. 저는 꿈을 실현하는 첫 영화로 노출 있는 역할을 잡았던 거죠. 처음에는 마냥 좋았죠. 팬클럽이 생기고, 매일같이 제 사진이 신문 일면에 도배되고. 하지만 저는 보수적인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라 뿌리부터 보수적인 사람이에요. 작은 시골 동네에 사시는 부모님은 어느 날 갑자기 ‘딸을 에로배우 만든 부모’가 되어버려 외출을 못하시게 되었고, 저 역시 영화 속 ‘유리’와 현실의 성은을 구별하지 않는 듯한 시선을 감당하기 어려워졌어요. 기자들은 슬쩍 돌려서 이렇게 묻더라고요. “예술과 외설의 차이가 뭘까요?” 그런 질문을 대체 왜 한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럼 16mm 영화와 35mm 영화의 차이는 뭔데요? 아무리 쿨한 척, 난 괜찮다고 해도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봐주질 않아요. 배우로서 역할과 인간으로서 사생활을 구분해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물죠. 에로영화와 포르노영화조차 구분하지 않으니까요.

곽현화 활동 영역에서 선택지가 없는 점도 많이 아쉬워요. 항상 섹시한 역할만 제안받죠.

이파니 다른 걸 해보고 싶어도 들어오는 일이 항상 비슷해서 벗어나기 어려워요.

곽현화 이파니에게 사극이 들어온다고 해봐요. 절대로 은장도를 쥐어주진 않거든요.

봉만대 연출자 입장에서는 이렇게 충고하고 싶어요. 만약 굳이 바꾸고 싶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다 멈춰라. 몇 년이라도 쉬고 돌아와라.

성은 먹여살려 그러면. 몇 년 쉴 테니까 우리 월급 줘.

이파니 옛날 기획사에서 연예인의 이미지를 바꿀 때 많이 쓰던 방법이죠. 2년 쉬게 하고 다른 분야로 진출시키는.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냐, 저는 이게 좋거든요.

곽현화 난 그래서 파니가 좋고요. 요즘 제가 수학 강의를 준비하고 있어서 교육자 이미지를 구축하려는데, 아무리 몸을 감싸도 태는 숨길 수 없잖아요? 저는 그 모순된 이미지를 즐겨요. “얘들아, 이 식에서 X에 O을 넣어보면….”

모두 푸하하하!

곽현화 성은아, 너도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려는 의무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성은 사람들은 항상 나에게 쿨하게 자기 본모습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데, 실은 쿨하지 않은 사람이 바로 내 본모습이야. 쉽게 상처받고 오래 걱정하는 보통 여자에 가깝지. 부정적 반응이 돌아와도 “신경 안 써. 내가 좋아서 한 거니까”라고 말할 수 있는 너희들의 쿨함은 정말 부럽지만, 난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게 나야.

봉만대 감독은 “바꾸고 싶다면 하고 있는 일을 멈춰라”라고 말했는데, 본인에게도 적용되는 충고 아닌가? 에로를 완전히 떨쳐내도 좋은 영화를 만들 자질이 충분한데, 왜 ‘에로 거장’이라는 타이틀을 멀리하지 않는가?

봉만대 에로를 다 알면 그만두겠죠. 아직 전 에로를 알지 못해요. 모르기 때문에 파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배우들도 세상 사람들에게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있듯이….

곽현화 질투의 대상인데요.

이파니 이미 질투의 대상이라고.

봉만대 그러나 사실 너희에게는 치명적 약점이 있어. 여자. 여자잖아. 늙어간다는 것. 그건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진다는 뜻이야. 대중은 결국 새로운 것, 젊은 것을 찾을 거야.

곽현화 매주 피부과를 가는 이유죠. 늘 혼란과 두려움 속에 있어요. 하지만 그래서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내 길은 이거야’라는 확신을 가지고 한길만 달렸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늙으면 저는 뭐가 될까요? 아마 여전히 새로운 길을 찾는 사람일 것 같아요. 적어도 스테레오타입에 머무는 사람은 아닐 거라는 사실만큼은 확신해요.

이파니 저는 걱정이 없는 사람이에요. 아이 하나만 생각하죠.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어요. 욕심이 하나 더 있다면, 이제는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열심히 한다’가 아니라 ‘정말 잘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성은 저는 늙어가는 게 두렵지 않아요. 20대 때 꿈이었어요, 빨리 나이 먹어 30대가 되는 게. 연기력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한계가 보였어요. 더 많은 시간을 살고 더 많은 감정을 삶 속에 쌓고 싶었어요. 내가 그리는 연기 색깔에 맞는 나이로 얼른 늙길 바랐죠.

곽현화 딱 하나, 이제 예능은 하고 싶지 않아요.

이파니 나도 같은 생각을 해요. 예능은 모든 걸 내려놓고 쏟아내야 해요. 사람을 소모시키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허무함이 밀려와요. 방송을 보면 웃긴 하죠. 웃음이 잦아들 때는 나도 그 웃음처럼 잊혀져버릴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고요. 소극장에서 했던 연극만큼도 기억에 남질 않아요.

분위기 너무 진지하다. 섹드립 잔치로 다시 돌아가면 안 될까? 영화 안에서 봉만대 감독이 곽현화에게 체위를 가르쳐주면서, 여자의 한쪽 다리를 들고 무릎 뒤쪽을 엄지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면 신음을 낼 수밖에 없다는 걸 가르쳐주는 장면이 있다. 정말 그런가?

이파니 소리 나죠. 바로 나와요.

곽현화 보세요. (스스로 무릎 뒤쪽을 누르고) 아학!

이파니 (성은의 무릎 뒤쪽을 누른다.) 나지?

성은 하하하! 간지러운데?

곽현화 성은이는 원래 신음 대신 웃음을 터뜨리면서 하는 애라 그럴 거야.

하하. 봉만대 감독이 직접 개발한 기술인가? 비기가 또 있다면 하나만 더 가르쳐달라.

봉만대 ….

성은 감독님이 인간의 신체 중에 구부러진 데는 누르면 다 신음이 나온댔어.

이파니 여기도 나고, 이 안쪽 여기도 나고, 요기도 난다 하고(묘사는 생략한다).

봉만대 ….

곽현화 <나·들> 독자들이 이런 비법을 전수해주면 좋아하겠지.

이파니 여기 안쪽에 이렇게 하면 많이 나고, 그리고 또 여기랑.

봉만대 ….

이파니 무엇보다 제일 자극적인 데는 여기라고.

봉만대 무슨 소리. 성기보다 자극적인 부위가 어디 있겠어. 그 외 자기 손이 잘 안 닿는 부위는 대개 성감대지. 예를 들어 등. 상대의 손이 잘 안 닿는 부위를 만져주는 게 좋아. 그리고 접촉 부위만큼 속도가 중요해. 빠르면 안 돼. 그게 마사지의 원리기도 하고.

이파니 역시 거장이다, 거장이야.

성적 욕망을 긍정하는 밝고 건강한 예술가들. 그리고 <아티스트 봉만대>는 짐짓 경멸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한편으로는 성적 욕망을 물물교환하는 데 주저 없는 영화업계와 관객의 비겁함을 질타하는 세련된 풍자영화다. <나·들> 창간 이래 인터뷰를 통해 독자에게 강매를 시도해본 적은 없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를 두어야겠다. 이 영화를 꼭 보기 바란다. 어떤 관객도 이 영화에서 기대하던 것을 얻긴 어려울 것이다. <아티스트 봉만대>에는 관객의 기대보다 한참 높고 많은 것이 담겼다. 봉만대 감독, 곽현화, 성은, 이파니 배우 모두 이 영화에서 선전포고에 가까운 모험을 감행했다. 감사의 말을 전한다. 소설가이자 영화작가로서, 올해 가장 만족스러운 영화적 경험을 했다. 진심이다.

글 손아람

힙합 그룹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의 멤버로 활동했다. 그룹 이름과 같은 제목의 소설을 써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서울 용산 참사를 소재로 정통 법정소설인 <소수의견>을 썼으며,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해 <너는 나다-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하다>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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