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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다큐멘터리로 해석한 노라노의 당당함

등록 2013-10-24 20:02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문화'랑'] 김영진의 시네마 즉설
지난 일요일 디엠제트(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후원으로 열린 학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용인대 허욱 교수로부터 흥미로운 말을 들었다. 연분홍치마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노라노>가 아주 훌륭한데 독립 다큐멘터리 진영에선 이 작품을 두고 시각이 엇갈린다는 것이다. 왜냐고 물었더니 연분홍치마에서 제작한 전작 <두 개의 문> 때도 그랬지만 이 집단에서 만드는 영화들이 현장성과 기록성을 중시하는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흐름을 거스르기 때문인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용산참사 사건을 법정 증언에 기초해 드라마처럼 재구성한 <두 개의 문>과 마찬가지로 <노라노>에도 실존 인물인 선구적 패션디자이너 노라노의 삶을 재연 드라마로 재구성한 단락이 있다. 노라노가 해방 후에 시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홀로 살아갈 삶을 결심하는 에피소드와 5·16 직후 정보기관에 끌려가 부조리한 심문을 받을 때 기개있게 응했던 에피소드가 재연 장면으로 삽입됐다. 두 장면 모두 이 다큐멘터리의 스토리에 상당한 긴장을 불어넣는다.

노라노의 패션디자이너 인생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리는 전시회 준비 과정을 따라가면서 관련 인사들의 인터뷰 위주로 전개되는 <노라노>는 구성이 탄탄하다. 몇 개의 플롯 축이 서로 단단하게 지탱해주는 힘을 보여준다. 스타일리스트 서은영이 지휘하는 전시회 준비는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지만 노라노는 고객들과 함께한 시간들을 생각한다. 멋진 전시회를 위해 후배들이 기획하는 윤색 작업에 노라노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갈등이 펼쳐지는 가운데 노라노가 해방 후 만든 옷들의 여성주의적 가치가 연구자들의 평가와 자료화면을 통해 상세하게 설명된다. 노라노의 옷을 입었던 당대의 유명 인사들의 증언이 이어지는 동안 노라노는 인터뷰와 내레이션을 통해 그 자신의 심경을 드러낸다. 노라노는 과거를 회상할 때는 당당하지만 선의로 자신의 전시회를 돕는 후배들과의 미팅에서는 자주 망설이고 당혹스러워하며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지 못해 낙담하는 표정을 짓는다.

<노라노>는 구성의 효율성과 균형 면에서 뛰어난 완성도를 갖춘 다큐멘터리다. 인물의 생애를 간명하게 요약하는 한편, 90분 동안의 요약만으로는 포착되지 않을 주인공 삶의 이런 저런 포말을 상상의 여지로 남겨둔다. 이건 쉬운 경지는 아니다. 실존인물에 굴복해 미화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도 노라노에게 온당한 존경을 표한다. 앞서 말한 재연 장면들은 그 온당한 존경의 극적 표식으로 보였다. 여자에게 결혼과 직업의 자유가 제한돼 있던 시절을 자기 힘으로 통과해온 주인공이 마음에 품었던 용기에 대해 짧고 굵게 강세를 준다. 무엇보다 이 다큐멘터리는 감상적이지 않다. 영화 말미에 최은희 여사가 등장하는 대목을 비롯해 몇몇 장면에서 감회를 숨기는 노라노의 표정을 보며 나는 잠깐 울컥할 뻔했다. 그러나 영화는 자기 호흡을 잃지 않는다. 당당하다는 것, 이 다큐멘터리가 해석한 노라노의 그 이미지가 굉장하다고 생각한다.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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