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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인류 대재앙보다 무서운, 나만 위험하다는 것

등록 2013-10-29 19:29수정 2013-10-29 21:12

‘1인 재난’이 특징인 <그래비티>. <한겨레> 자료사진
‘1인 재난’이 특징인 <그래비티>. <한겨레> 자료사진
영화 ‘그래비티’가 던진 질문

바이러스·자연재해 습격이라는
일반적 재난영화와 달리
우주에 남겨진 인간의 투쟁
‘사소한 목숨은 없다’ 다시 일깨워
좀비 블록버스터 <월드 워 Z> 원작자 맥스 브룩스는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라는 책도 썼다. 좀비를 만날 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내용이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실제로 좀비가 등장했을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인지를 상정해 다큐멘터리로 만든 적도 있다. 사람을 물어뜯는 건 아닐지라도 무차별적으로 인간을 공격하는 바이러스의 습격은 이미 현실에, 과거에도 존재했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컨테이젼>은 급성 바이러스가 전세계로 퍼져나가는 위태로운 상황을 다룬다. 김성수의 <감기>도 비슷하다. <컨테이젼>은 스펙터클에는 관심이 없다. 아니 거리가 텅 비고, 거대한 강당에 가득한 병상만으로도 이미 스펙터클이긴 하다. 다만 <컨테이젼>은 오로지 보고서를 들려주는 것처럼 일관한다. <월드 워 Z>의 원작 소설이 좀비를 물리친 뒤 유엔에 제출한 보고서 형식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흥미롭다.

재난영화는 드라마틱한 스펙터클을 원하는 대중의 눈을 사로잡았다. 화산, 지진, 태풍과 토네이도, 운석 등 자연 재해부터 외계인 침공, 거대 생물, 좀비 등 초자연적 존재까지 재난영화의 스펙트럼은 무한대다. 그리고 현실로 침투하고 있다. 일부러 위험한 혹은 멍청한 짓을 벌인 뒤 영상을 찍는 <잭애스>란 영화가 있었다. <트위스터>에 등장했던, 토네이도를 따라가며 관찰, 기록하는 ‘토네이도 헌터’가 되려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최근 일본에서는 한국의 학습만화 <방사능에서 살아남기>가 나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서바이벌’은 21세기의 현실이자 극단적인 오락이 되고 있다. 현실 사회에서는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야 하지만 자연에서는 오로지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최선이다. 나무에서 내려 온 순간 인간에게는 ‘서바이벌’이 절체절명의 목표였지만, 문명을 이루면서 절대적인 본능을 지워버렸다. 하지만 유전자는 기억하고 있다. 맹수들과 자연재해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인류가 어떤 투쟁을 했는지를.

‘1인 재난’이 특징인 <오픈 워터>(위부터)와 <127시간>. 평범한 자연이 재난 상황에선 무서운 현실이 된다는 것을 그린 영화들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1인 재난’이 특징인 <오픈 워터>(위부터)와 <127시간>. 평범한 자연이 재난 상황에선 무서운 현실이 된다는 것을 그린 영화들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런 점에서 <그래비티> <올 이즈 로스트> 등 개인의 ‘서바이벌’을 그린 영화들이 더욱 눈에 들어온다. <오픈 워터> <더 캐년> <127시간> 등도 있다. 엄청난 대재앙이 닥치는 일반적인 재난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들은 개인에게 국한된 재난을 그린다. 우주, 바다, 계곡 같은 곳에 홀로 남게 되고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이야기다. 대재앙이 닥치면서 연대감을 느끼고, 휴머니즘을 자아내는 재난영화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1인, 개인 재난 영화라고나 할까.

<오픈 워터>에서 스킨 스쿠버를 하던 부부는 배가 떠나버리고 단둘이 남았음을 알게 된다. 착오로 인원 파악을 못한 것이다. <오픈 워터>에는 ‘재난’이라고 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바다는 고요하고, 상어는 유유자적 지나갈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공포다. 육지가 전혀 안 보이는 망망대해에 오로지 그들만이 떠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다. <더 캐년>에서 그랜드 캐니언에 놀러 간 신혼부부는 가이드와 함께 노새를 타고 계곡 아래로 내려간다. 사고로 가이드는 죽고, 그들은 올라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대니 보일의 <127시간>에서 홀로 계곡과 암벽을 누비던 아론은 떨어진 바위에 손이 끼이고 만다. 있는 것은 주머니칼과 로프와 물병뿐. 이 영화들은 모두 실제 사건에 기초해 있다. 엄청난 재앙을 만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연일 뿐인데도, 한 개인에게는 엄청난 재난이 된다. 인간의 생존본능을 일깨우는, 오로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한 투쟁을 보여주는 이 영화들은 극도의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다.

<그래비티>는 우주에서, <올 이즈 로스트>는 바다에서 조난을 당해 살아남으려는 투쟁이다. 인간이 얼마나 별것 아닌 존재인지 <그래비티>는, <올 이즈 로스트>는 말한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살아남은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지도 말할 수 있다. 자연에서, 우주에서 생존은 그저 하나의 사실에 불과하지만 모든 생명체는 그 사소한 목숨을 위해 언제나 악전고투하고 있다. 21세기 우리는 대재앙에서 살아남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생존하는 방법, 서바이벌의 감각을 되살리기 위해서 이 영화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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