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영화·애니

‘아라비아의 로렌스’ 피터 오툴 별세

등록 2013-12-16 11:01수정 2013-12-17 11:26

첩보장교 역으로 스타 된 뒤
1960~70년대 대작 배우 명성
아카데미 주연상은 못 받아
영화 <아라비아의 로런스>의 주연배우 피터 오툴(사진)이 14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

그는 최근 노환으로 영국 런던 웰링턴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이날 숨졌다. 오툴의 딸 케이트는 “아버지와 우리 가족을 향한 사랑과 관심이 넘쳐나고 있다”며 각계의 조의에 감사를 표했다.

아일랜드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한 오툴은 강렬한 성격 묘사와 카리스마로 <아라비아의 로런스> 등 1960~70년대 예술성을 겸비한 대작 영화의 대표 배우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사망에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아라비아의 로런스>에서 그의 연기는 놀라웠다”며 명복을 빌었다. 마이클 히긴스 아일랜드 총리도 “아일랜드와 세계는 영화와 연극계의 거인 중 하나를 잃었다”며 조의를 밝혔다.

데이비드 린 감독의 <아라비아의 로런스>에서 오툴은 1차대전 때 오스만제국에 대항한 아랍 부족들의 반란을 부추긴 실존 인물인 영국 첩보장교 로런스 역을 맡았다. 중동 전문 고고학자로 시작해 영국 첩보장교가 된 실존 인물 로런스처럼 오툴도 기자와 해군 장교로 활동한 뒤 연극을 전공하고 배우로 입문했다. 1955년 영화 <햄릿>의 주연으로 명성을 얻은 그는 자신의 4번째 작품인 <아라비아의 로런스>로 슈퍼스타가 됐다.

하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 능력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에 오를 때마다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가 나중에 공로상을 받았다. 그가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지 못한 것은 아카데미 사상 최대 실수로도 꼽힌다. 그는 2003년 아카데미 공로상에 지명되자 80살이 될 때까지 이 상을 받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결국 수락하며 자신은 언제나 “신부가 아니라 신부의 하녀였다”며 연기보다는 인기에 치우친 영화계 세태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70년대 과음과 위암 발병 등으로 연기 인생에 위기를 맞았으나 절주를 선언하고 무대에 다시 복귀했다. 말년인 2006년엔 <비너스> 등으로 또 한번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대작 영화 물결이 사라지면서 그의 고전적 연기 스타일은 상업영화 제작자들에게 큰 환영을 받지 못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