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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잘가요, 꼬마 아가씨

등록 2014-02-17 13:43수정 2014-02-17 13:44

셜리 템플
셜리 템플
영원한 꿈의 아역, 셜리 템플이 현지시각으로 2월11일 타계했다. 향년 85.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아역스타의 죽음에 할리우드 전체가 들썩였다. 미국배우조합(SAG)의 켄 하워드 회장은 템플이 2006년 미국배우조합으로부터 평생공로상을 받은 사실을 언급하며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템플의 사망을 믿을 수 없다. 그녀는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진정한 아이콘이었으며 우린 동료로서 그녀를 무척 사랑했다.” 폭스사의 짐 지아노풀로스 회장 역시 “미국의 리틀 달링(America’s Little Darling), 그녀는 이십세기 폭스의 사라지지 않을 유산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1928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셜리 템플은 1930년대 대공황 시절 특유의 쾌활함으로 할리우드에서 크게 사랑받았던 아역배우다. 세살에 데뷔, 여섯살에 출연한 <리틀 미스 마커>(1934)와 <브라이트 아이즈>(1934)로 템플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대공황으로 우울했던 미국인들에게 템플의 천진한 미소는 따뜻한 위안이 돼주었다. 트레이드 마크인 귀여운 보조개와 금발의 곱슬머리가 템플의 사랑스러움을 더했다. 템플을 ‘기적의 꼬마 아가씨’(Little Miss Miracle)라고 불렀던 루스벨트는 “우리에게 셜리 템플이 있는 한, 우리는 잘될 것입니다”라는 말로 국민을 위로했다. 1935년, 템플은 일곱살에 아역부문 오스카상을 수상해 역대 아카데미 최연소 수상의 영광을 안기도 했다.

하지만 전성기는 짧았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템플의 영화 출연은 드물어졌다. 이십대가 된 템플은 사업가 찰스 올든 블랙과 결혼했고 결혼과 동시에 정계에 입문했다. 의원직에서 한번 낙선했지만 그 뒤 차례로 유엔 미국 대사, 가나 미국 대사, 체코슬로바키아 미국 대사가 되어 일했다. 배우로서의 짧은 삶을 접고 정치인으로 더 긴 삶을 살았던 템플은 다시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기적의 꼬마 아가씨로 영원히 남게 됐다.

글 : 윤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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