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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옛 할리우드 키드에게 허리우드극장이란

등록 2014-03-20 19:50

듀나의 영화 불평
오근재의 <퇴적 공간>을 읽었다. ‘은퇴한 노교수가 바라본 대한민국의 사각지대’로 소개되는 이 책은 탑골공원에서부터 구허리우드극장에 이르는 노인들만의 공간을 바라보려는 시도이다. 결론만 말하면 내가 필요했던 책은 아니었다. 내가 필요했던 책은 종묘 부근의 (남자) 노인들에 대한 인류학적인 보고서였다. 하지만 저자의 머릿속은 이미 쌓아놓은 지식과 이론으로 꽉 차 있어서 시작하기도 전에 이들을 정의하고 일반론에 가두어 버린다. 당연히 인터뷰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내가 쓰고 있는 것은 영화 칼럼이니, 지금부터는 허리우드 클래식 챕터에 집중하기로 하겠다. 냉정하게 이 챕터의 내용을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우선 그는 ‘클래식’의 어원에 대해 생각한다. 다음에 허리우드 클래식관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한 다음 조지 스티븐스의 <셰인>을 보러 들어간다. 영화는 엉성하고 촌스러워 보였다. 보드리야르를 동원해가며 서부극 서사의 일반론을 요약한 그는 극장을 나가면서 관객들 중 여자들이 많다는 걸 발견한다. 여자들이 더 감수성이 풍부한가 보다, 라고 생각한 그는 우연히 이오네스코의 <의자들>이 생각났는지 거기에 대해 조금 이야기한다.

그럼 이 짧은 챕터에서 저자가 놓치고 지나간 것들을 살펴보자. 우선 ‘여자가 많다’는 게 얼마나 특별한 정보인지 저자는 진짜로 모르는 걸까? 종묘 주변 노인네들의 퇴적 공간은 거의 남자 노인들의 세계이다. 하지만 허리우드극장 근처는 노인들의 일대일 양성관계가 활성화된 몇 안 되는 공간이다. 카바레가 있던 2008년 무렵엔 더 그랬다. 외부인 눈에는 잘 안 보이지만 굉장히 활기찬 드라마가 전개되는 곳이다. 그런데도 저자는 그걸 눈치채지 못한다.

둘째로, 저자는 이 극장을 찾는 관객들이 그냥 오갈 데 없는 초라한 노인들의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모른다. 그런 사람들도 있다. 그냥 교우관계를 원해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자기 세대만의 주체적인 취향이 있는 문화적 집단이다. 이들은 허리우드 클래식뿐만 아니라 다른 실버영화관, 상암동 영상자료원, 용산 디브이디(DVD) 전문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는 이들이 그냥 나이를 먹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세대라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당연히 이는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의 시작이다.

셋째로, 그곳은 노인만의 공간이 아니다. 물론 7000원을 내고 허리우드 클래식에 들어가는 젊은 관객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바로 오른쪽에 있는 거의 똑같이 생긴 상영관에서는 허리우드 클래식에 들어가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옛 영화들을 상영하며 심지어 두 레퍼토리가 시간차를 두고 겹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옛 ‘할리우드 키드’와 90년대 이후 영화관 세대의 비교와 충돌에 대해 조금 더 깊게 연구해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이야기는 저자의 관찰력과 관찰하려는 의지의 부족으로 넘어간다. 그에게 노인은 자신의 인문학적 지식으로 얼마든지 재단할 수 있는 추상적인 무리에 불과하다. 그들은 책의 재료이지 주인공이 아니다. 책에서 이들 현실의 디테일이 위축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허리우드 클래식 챕터가 그중 유달리 내 눈에 뜨였던 건, 이 극장을 자주 찾는 관객들이라면 관심이 없어도 알 수밖에 없는 뻔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묘사된 다른 공간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듀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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