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호 감독은 쉬는 동안 ‘내 영화 인생은 끝난 것인가’라는 생각에 공포감도 느꼈다고 고백했다. 한국 영화의 비약적 발전과 함께 세계적 명성을 얻은 후배들을 보며 ‘난 왜 늘 밑거름이 돼야 하나’ 하며 억울하기도 했단다. 하지만 신작 <시선>으로 ‘한국 감독은 나이 들면 끝’이라는 편견을 깼다는 평가를 받으니, 이젠 충분히 보상받은 기분이라고 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영화 ‘시선’ 이장호 감독
‘별들의 고향’ 철부지 시절 작품
벗어나고픈 ‘주홍글씨’이기도 해
‘시선’은 종교적 색채 짙은 영화
영화 찍을 땐 빚만 졌는데
쉬는 동안 빚 갚고 잘살아
난 어슬렁대며 한눈파는 늑대
‘별들의 고향’ 철부지 시절 작품
벗어나고픈 ‘주홍글씨’이기도 해
‘시선’은 종교적 색채 짙은 영화
영화 찍을 땐 빚만 졌는데
쉬는 동안 빚 갚고 잘살아
난 어슬렁대며 한눈파는 늑대
“돈도 벌고 명예도 얻는 영화 많이 했잖아요? 데뷔 40년 만에 이젠 내 색깔을 담은 영화 좀 해보려고요.”
19년 만에 돌아온 이장호(69) 감독은 몹시 들떠보였다. 하루에 6~7개의 인터뷰를 소화하노라니 “얼떨떨하고 적응이 안 되면서도 생기가 도는 기분”이라고 했다. 지난 1995년 <천재선언> 이후로 오랜 시간 침묵했던 이 감독이 영화 <시선>(17일 개봉)을 들고 돌아왔다. 그를 7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젊은 사람들이 저를 알겠어요? 텔레비전에서 틀어주는 옛날 영화 좀 봤으려나?”
그는 1970~80년대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다. <별들의 고향>(1974), <바보 선언>(1983),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등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이 발표한 한국영화 100선 중 ‘톱 10’에 그의 작품이 3편이나 올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옛 영화들을 “철부지 시절에 만든 자기 위안적 작품”이라고 했다. 영화가 뭔지, 연출이 뭔지조차 잘 모르던 젊은시절 너무 큰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다. 60년대 신상옥 감독 밑에서 영화를 배운 그의 입봉작인 <별들의 고향>은 46만의 관객을 동원했다. 당시로서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지금도 그 ‘경아 오랜만에 누워보는군’이란 대사가 회자되잖아요? 아, 이젠 좀 벗어나고 싶어. <별들의 고향>은 제 인생을 바꾼 작품이지만, 오늘날까지 벗어나고픈 ‘주홍글씨’기도 해요.”
입봉작 성공을 시작으로 에로영화,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했다. 그가 메가폰을 잡은 <무릎과 무릎사이>(1984), <어우동>(1985)은 80년대를 대표하는 에로영화가 됐다.
그는 왜 오랫동안 침묵한 것일까? “19년은 숙명적인 슬럼프였어요. <천재선언> 이후 황석영 소설 <장길산> 등을 영화로 만들려고 판권을 샀는데, 그 영화부터 이상하다 싶을 만큼 하는 작품마다 자꾸 엎어지더라고요.” 그는 이후 중부대, 전주대 등에서 영화 관련 학과 교수로 일했고, 한국방송(KBS), 기독교방송(CBS) 등 아침방송도 진행하며 영화와는 거리를 두고 지냈다. “재밌는 건 영화 찍을 땐 빚만 졌는데, (영화) 쉬는 동안에 빚도 다 갚고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거예요. 임권택 감독님이 어느날 ‘이 감독은 요즘 영화 빼고는 다 하냐’고 하더라고요. 하하”
새 영화 <시선>은 다소 종교적인 영화다. 선교사 조요한(오광록)과 한국인 8명이 가상의 나라 이스마르로 선교여행을 갔다가 그곳 반군에 피랍된다. 오랜 억류로 인한 불안감으로 서로간의 갈등이 폭발하면서 감춰둔 거짓과 위선이 드러나고, 각자 믿음과 구원에 대한 진실한 성찰을 해 나간다는 내용이다.
그는 긴 슬럼프를 겪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다고 했다. 삶의 진리는 눈에 보이는 부귀와 권세가 아닌, 보이지 않는 것 속에 숨어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도 <시선>으로 정했다. “종교적 색채가 짙은 영화라 배타적인 관객도 많겠죠.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도 이기심과 이타심 사이의 갈등, 잃어버린 본향에 대한 향수 같은 것들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해요.”
앞으로도 독립영화나 예술영화의 새로운 길을 틀 수 있는 작은 영화를 계속 만들고 싶다고 했다. 차기작 역시 베트남 보트 피플을 구해준 전재용 선장의 이야기를 다룬 <96.5>(가제)다. “제가 원래 권태감을 잘 느끼는 인간이예요. 사람들이 종종 임권택 감독과 비교를 하는데…. 임 감독은 묵묵히 한국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는 소라면, 전 어슬렁대며 한 눈을 파는 늑대랄까?”
겸손한 노장은 영화의 흥행에 대해서도 소박한 바람을 밝혔다. “영화에 돈을 댄 사람들이 손해를 안 봤으면 해요. 특히 후배인 강우석 감독이 배급에 나섰는데, ‘본전치기’라도 했으면. 지금은 그게 제일 큰 소원이네요.”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