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속도감, 갈등이 분명한 이야기 구조를 갖춘 덕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한국 영화계가 탐내는 ‘원작’이 됐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관객의 마음을 흔드는 가장 큰 이유는 항상 ‘인간’을 중심에 두기 때문이다. 사진은 <백야행>. 각 회사 제공
[문화‘랑’] 영화
소설 ‘방황하는 칼날’ 영화화
‘백야행’ ‘용의자 X’ 침체 딛고
절실한 상황 설정과 열연으로
관객들 공감 끌어내는 데 성공
소설 ‘방황하는 칼날’ 영화화
‘백야행’ ‘용의자 X’ 침체 딛고
절실한 상황 설정과 열연으로
관객들 공감 끌어내는 데 성공
한국에서 <백야행>(2009)과 <용의자 X>(2012)에 이어 지난 10일 개봉한 <방황하는 칼날>까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영화화가 벌써 세번째다. 영화만이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제외하면, 히가시노 게이고(사진)는 지금 한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일본 작가다. <용의자 X의 헌신> <한여름의 방정식> 등 천재 물리학 교수 유카와가 주인공인 ‘갈릴레오’ 시리즈와 감동적인 판타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등이 연이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한국만이 아니라 히가시노 게이고는 일본에서도 정상급의 인기 작가다. 갈릴레오 시리즈와 <신참자> 등의 가가 형사 시리즈 등 거의 모든 작품이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졌다. 국내 작가의 소설도 영화화되기 쉽지 않은 판에 한국 영화계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를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상당히 다양한 소재를 건드린다. ‘누가 왜 어떻게 죽였는가’를 밝혀내는 전형적인 범죄소설인 가가 형사 시리즈가 있고, 물리학자를 내세워 불가능한 상황으로 여겨지는 사건들을 과학적으로 풀어내는 갈릴레오 시리즈도 있다. 뇌 이식 수술로 인격이 바뀌는 <변신>, 성정체성의 혼란을 다룬 <아내를 사랑한 여자>, 유전자 조작의 위험성을 다룬 <레몬>, 일본 교육제도의 문제점을 공격하는 <호숫가 살인사건>, 죽은 아내의 영혼이 딸의 육체에 들어가는 <비밀> 등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이슈를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서 만날 수 있다. 일부에서는 ‘소재주의’라는 비판도 하지만, 단순히 소재를 건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그럴듯한 상황을 만들어 독자가 단숨에 빠져들 만한 스토리를 끌어낸다. 이야기가 시작되면 결말까지 일사천리로 달려간다. 간혹 단순하고 식상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경우도 많지만 엔터테인먼트 작품으로서는 탁월한 완성도를 과시한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가 단지 말끔한 오락물만을 뽑아내는 작가라면 지금 같은 명성을 누리기는 힘들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수작과 범작을 오락가락하다가 가끔은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리며 감동적인 걸작을 내놓는 탁월한 작가다. 그중에서도 <백야행>은 발군이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며 범죄를 저지른 남자가 있다. <백야행>은 정교하고 기묘한 트릭을 풀어가며 범인의 정체를 밝히는 소설이 아니다. 오로지 그 남자와 그가 사랑했던 악녀의 주변만을 보여준다. 그들이 저지른 범죄와 그들이 살았던 시대만을 차분하고 냉정하게. 어둠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남녀의 모습을 통해 성장일로를 달려온 일본 사회의 짙은 그림자를 드러낸다.
<용의자 X의 헌신>에도 짝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대신 죄를 덮어쓰는 남자가 나온다. 사회와 타협할 수 없는, 순진하지만 고집스러운 수학교사는 그 누구도 풀 수 없는 알리바이를 만들어낸다. 수학과 과학은 하나의 답을 위해 필요 없는 모든 것을 버린다. 수학의 천재만이 가능한, 발상을 완벽하게 뒤집지 않는다면 해결할 수 없는 트릭을 그는 만들어낸다. 하지만 <용의자 X의 헌신>의 트릭은 단지 트릭일 뿐이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핵심은 그 남자의 사랑이다. 냉혹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감추어진 열정과 온정을 느낄 수 있다.
<방황하는 칼날>은 딸을 죽인 범인들에게 복수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그 남자들의 상황은 모두가 극단적으로 절실하다. 최악의 상황, 조건 앞에서 그들은 범죄를 택해야만 한다. 독자는, 관객은 그들의 흔들리는 마음에 동조한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이야기가 흘러가지만, 감정적으로 마음이 끌리기에 기어이 그들의 손을 잡고 싶어진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엔지니어 출신이다. 어찌 보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이과의 방식으로 설정과 구성을 체계적으로 만들어놓고 일사천리로 달려간다고 할 수 있다. 인물의 심리를 깊게 파고들기보다 주변 상황을 통해 추정하게 만든다. 한국 영화계가 히가시노 게이고를 선호하는 이유는 그런 명징함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동안 한국에서 만들어진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 영화에 대한 평은 그리 좋지 못했다. <백야행>은 흥미로운 설정을 끌어와 ‘동기’에만 주력했을 뿐, 두 남녀의 내면을 전혀 그려내지 못했다. 신파를 넣은 것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그들이 어떤 인간인지를 전혀 그려내지 못한 것은 패착이다. <용의자 X>에서는 갈릴레오 대신 평범한 형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기에, 두 천재의 대결이라는 원작의 흥밋거리를 살리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그 남자의 신파를 부각시킬 수밖에 없었다. 트릭을 풀다 보면, 이야기에 홀려 따라가다 보면 ‘신파’가 있어야 감동할 수 있는데 한국판 <백야행>도, <용의자 X>도 그 지점에서 실패했다. 반면 <방황하는 칼날>은 트릭이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아버지의 심정에 딸려갈 수 있는 이야기다. 누구라도 동의할 수 있는, 설사 그 행위를 인정할 수는 없어도 심정만은 이해가 가는 상황을 그린 영화. 그런 이야기는 한국 영화의 열정적인 터치로서 더욱 부각될 수가 있다.
한국 영화계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탐내는 이유는 속도감이 뛰어난, 갈등이 분명하고 구조가 선명한 이야기에 있다. 게다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소재를 그럴듯하게 다듬어내는 것에만 능한 작가가 아니다. 가장 좋아하는 책이 만화인 <내일의 조>와 <거인의 별>이라 말하는 것처럼, 히가시노는 인간의 의지와 연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작품에 표현하는 작가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서 인간의 ‘기적’을 성실하게 그려내기도 하는 것처럼,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는 언제나 ‘인간’이 중심에 있다.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loutsid@naver.com
히가시노 게이고.
영화 <방황하는 칼날>. 각 회사 제공
영화 <용의자 X>. 각 회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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