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나의 영화 불평
태준식 감독의 <슬기로운 해법> 시사회가 4월30일 인디스페이스에서 있었다. 2009년 ‘한 인물(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사법처리에 “슬기로운 해법”’을 주문한 <중앙일보>의 기획시론에서 제목을 따왔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조중동의 전쟁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영화이다. 한 남자의 죽음으로 맺어진 이 이야기를 다시 따라가는 동안 영화가 작정하고 전달하는 것은 순수한 분노이다. 개인적인 비극의 참혹함은 당연한 것이고, 이후 몇 년 동안 언론 수준이 브레이크도 없이 추락하는 과정을 차가운 머리로 지켜보기는 쉽지 않다.
영화의 기능은 무엇일까. 제목은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밑바닥까지 떨어진 이 상황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해답을 찾는 과정은 영화 후반에만 잠시 보여줄 뿐이고 그 역시 연장된 인터뷰의 나열일 뿐이다. 이 영화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관객들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몇 년 동안 마르고 닳도록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 씹어 왔을 타깃 관객들은 조금 다른 메시지를 주는 영화를 보고 싶었을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영화로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이미 타깃 관객들은 영화가 주는 정보 대부분을 알고 있다. 타깃 관객이 아닌 사람들은 이 영화만으로 쉽게 설득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영화의 인터뷰이 선택과 접근법은 외부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계산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이 두 그룹의 사람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슬기로운 해법>에서 가장 필요했던 것은 정보보다 태도가 아니었나 싶다. 논쟁이 많은 인물이지만 마이클 무어가 이 영역에서 성공을 거두었던 것도 그 태도였다. 무어 역시 자신이 카메라를 들고 치르는 전쟁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그는 그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신나고 재미있는 무언가로 만들었다. 종종 그 야심이 지나쳐서 스캔들에 말려들긴 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분명 중간 위치의 의견 없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 어차피 <야만의 언론>이 나왔던 때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렀고 그동안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처음의 접근법을 그대로 수호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같이 생각해보자”는 정직하고 고상한 말이지만 정말 여기서 무언가가 나올 수 있을까. 이 영화 이전에 여러분은 여기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는가.
남의 영화를 어떻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가장 나쁜 종류의 리뷰이다. 나 역시 여기서 더 나가고 싶지는 않다. 내가 많이 언급하지 않았을 뿐 <슬기로운 해법>은 많은 것을 이룬 영화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불가능한 여정을 참고 극복할 수 있게 힘을 주는 쇼인 것 같다. 굳이 위태롭게 마이클 무어를 따라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분노와 계산을 넘어설 무언가가 필요하다. 나는 그 무언가가 유머라고 믿는다. 적어도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추락을 하는 지금 이 상황만큼 유머가 필요한 때는 없다.
듀나 칼럼니스트
듀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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