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의 한 장면. 사진 씨제이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의 절반 ‘명량대첩’ 재현
임진왜란 6년인 1597년 왜군은 조선을 다시 침략한다. 정유재란이다. 누명을 쓰고 파면당했다가 삼도수군통제사로 돌아온 이순신(최민식)에게 남은 거라곤 전의를 잃은 병사와 두려움에 떠는 백성, 12척의 배뿐이다. 9월16일 왜군이 330척의 배를 이끌고 전남 진도 앞 명량해협으로 몰려온다. 누가 봐도 뻔한 12척과 330척의 싸움. 하지만 우리는 안다. 이순신 장군은 거짓말처럼 단 한 척의 배도 잃지 않고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아는 역사 소재를 영화화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관건은 정해진 결말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풀어가느냐에 달려 있을 터. <명량>은 두 시간 좀 넘는 영화의 절반을 전투 직전 돌아가는 상황에, 나머지 절반을 명량대첩에 할애한다. 실제로 8시간 동안 벌어진 해전을 61분의 상영시간에 담아냈는데, 이게 바로 영화의 고갱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기적 같은 승리가 가능했는지를 영화는 실제와 상상을 절묘하게 버무려 생생하게 펼쳐놓는다.
조류 변화가 심하고 물살이 회오리처럼 휘돌아 울돌목이라 불리는 공간부터가 드라마틱하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각오로, 겁먹은 부하들의 배를 뒤로하고 홀로 적진에 뛰어든 대장선의 외로운 싸움은 차라리 한 편의 드라마다. 적군과 아군 모두에게 가장 큰 적인 ‘두려움’을 이용하는 전략은 그 어떤 해전 전법보다도 극적이다. 연출과 각본을 맡은 김한민 감독은 “전반부 드라마, 후반부 액션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해전 속에도 드라마가 살아 있도록 하는 데 역점을 뒀다”고 말했다.
이순신 하면 상징처럼 떠오르는 거북선은 실제 명량대첩에서 쓰이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12척 배는 모두 판옥선이다. 영화는 주조하던 거북선이 출정을 코앞에 두고 불타는 허구의 장면을 넣음으로써 이순신이 느꼈을 절망감을 관객의 가슴으로 이입한다. 짧지만 효과적인 거북선 활용법이다.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반일정서에 기댄 애국심 마케팅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이순신의 절박한 마음이다.
스펙터클한 해전 재현에 필수적인 컴퓨터그래픽은 선방한 편이다. 배는 빠르게 전진하는데 노가 미동도 하지 않는 등 어색한 장면도 있지만, 몰입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깊이 몰입하게 만드는 건 배 위에서 벌어지는 백병전 장면이다. 좁은 공간에서 얽히고설켜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지는 연옥도를 롱테이크로 촬영한 장면은 숨을 멎게 한다. 전작 <최종병기 활>에서 군더더기 없이 직선으로 내달리는 연출을 선보인 김 감독은 자신의 장기를 또다른 방식으로 활용했다.
<명량>은 적선과 충돌해 부숴버리는 ‘충파’ 전술을 쓰는 거북선처럼 시종일관 장중하고 묵직하게 앞만 보고 나아간다. 그 리듬에 올라타면 2시간이 금세일 테지만, 안 그런 관객에겐 버거울 수도 있겠다. “장수 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는 이순신의 말은 오늘날 위정자들을 향한 일갈 같기도 하다.
서정민 기자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사진 씨제이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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