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은 이효석, 현진건, 김유정의 단편소설을 엮어 만든 고전문학 옴니버스 애니메이션이다. 세 작가가 추구했던 서정성과 사실성, 해학성의 깊이를 한꺼번에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사진은 <메밀꽃 필 무렵>의 한 장면. 더홀릭컴퍼니 제공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고교시절, 우리 모두를 울리고 웃겼던 1920~30년대 한국 대표 단편 문학이 애니메이션으로 찾아왔다.
오는 21일 개봉하는 애니메이션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김유정의 <봄·봄>을 원작으로 한 옴니버스 형식의 영화다. 국내에서 단편 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어책에서 글로만 봤던 고전의 주인공들이 감성적인 색채로 살아 움직이며 시·청각적인 자극을 주는 경험은 놀랍도록 신선하다. 한 편의 영화 속에서 이효석의 서정성, 현진건의 사실성, 김유정의 해학성 등 세 작가의 작품 세계를 고루 맛볼 수 있는 것도 큰 매력이다.
먼저 <메밀꽃 필 무렵>은 잔잔하면서도 애달픈 서정성이 짙게 느껴진다. 원작에서 이효석이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고 묘사한 메밀밭 풍경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메밀꽃 향기가 스크린을 타고 흐르는 듯 하다. 원작의 세심하고 시적인 표현을 살리려 노력한 흔적도 역력하다. 허생원과 동이의 대화 속에 생략된 행간 역시 충분히 살려냈다는 느낌이다. 또 닭을 잡고, 물건 값을 흥정하고, 실랑이를 벌이는 봉평 장터의 왁자지껄한 풍경이 영화 시작 뒤 5분 남짓 이어지는데 마치 잃어버린 고향을 찾은 듯 훈훈하고 정감 있다. “소설의 무대가 된 평창(봉평) 일대를 여러 차례 방문해 특색을 파악했다”는 제작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두 번째 작품인 <봄·봄>은 김유정 특유의 해학과 풍자가 잘 살아난다. 3년 반이라는 긴 시간 동안 데릴사위라는 명목으로 머슴살이를 하는 어수룩한 ‘나’와 딸의 키를 핑계로 혼례를 미루는 ‘장인’의 대화는 폭소를 자아낸다. 특히 중간중간 원작의 맛을 극대화하기 위해 판소리(도창)를 삽입해 흥을 돋운 것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다. 비속어와 사투리가 많지만 그 안에서 시골 특유의 정감이 드러난다. “장인님, 니가 어쩔 건데”등 어법에는 맞지 않지만 재치가 넘치는 ‘나’의 말재주 역시 시종일관 관객을 유쾌하게 만든다. 다만, 원작의 한 구절구절을 살리려다보니 대사 진행이 너무 빠르다. 이 작품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겐 좀 버거울 수 있겠다.
마지막 <운수 좋은 날>은 세 작품 가운데 가장 무거운 느낌을 준다. 인력거꾼 김첨지의 하루 일상을 통해 당시 하층민의 비참한 현실을 그려낸다. 어두운 분위기의 사실주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다 보니 그림의 톤 역시 우중충하다. 작품 내내 비와 눈이 번갈아 내리고 인력거를 끄는 김첨지의 얼굴 역시 그늘이 가득하다. 하지만 모노톤을 바탕으로 그려낸 남대문, 서울역 등 당시 인력거꾼들이 모이던 1920년대 경성(서울)의 모습은 오히려 세련되고 모던한 느낌을 준다. 비에 젖어 흐려진 남대문 단청 무늬 하나하나, 전차가 오가는 역 풍경 등이 매우 세밀하고 사실적이어서 놀랍다. 제작진은 옛날 사진자료와 외국 작가들의 기록 등을 샅샅이 뒤져 작품의 기본 자료로 삼았다고 한다.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은 기성세대에게는 옛 추억에 잠기는 촉촉한 감성을, 젊은 세대에게는 입시공부 때문에 미처 알지 못했던 원작들의 참맛을 새롭게 느낄 수 있게 하는 영화다. 영화를 보기 전 낡은 책장에 꽂힌 교과서를 다시 한 번 꺼내 읽고 가서 비교하며 보는 것도 색다른 감상법이 될 듯하다.
안재훈·한혜진 감독은 “‘뽀로로’등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은 많지만, 정작 어른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은 없는 현실에서 단편 문학 애니가 어떤 화두를 던질 수 있다고 본다”며 “볼 것, 즐길 것이 많아 고전문학은 접하기 어려운 분야가 돼 버렸지만, 이번 영화를 통해 소설 속 감성이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모두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제작진은 앞으로도 황순원의 <소나기> 등 다른 한국 단편 문학도 애니메이션으로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사진은 <운수 좋은 날>의 한 장면. 더홀릭컴퍼니 제공
사진은 <봄봄>의 한 장면. 더홀릭컴퍼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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