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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당신의 시간은 분절없이 흐르나요?

등록 2014-09-03 20:55

홍상수 새 영화 ‘자유의 언덕’ 속 한 장면.
홍상수 새 영화 ‘자유의 언덕’ 속 한 장면.
홍상수 새 영화 ‘자유의 언덕’
북촌 게스트하우스 배경 연애담
순차성 거부해 꿈·현실 뒤죽박죽
영화문법 붕괴했지만 문제 없어
홍상수표 ‘찌질한 인간군상’ 여전
‘삶’은 시간의 연속이다. 하지만 시간이란 ‘과거→현재→미래’처럼 선후관계가 분명하고 분절없이 이어지는 것일까? 과거는 현재의 원인이고, 미래는 현재의 결과일까? 홍상수 감독의 영화 <자유의 언덕>(4일 개봉)은 형식의 파괴를 통해 관객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홍 감독의 모든 영화가 그렇듯 <자유의 언덕>은 전작들과 여러모로 닮아 있다. 시간과 꿈에 대한 감독의 시각은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3)을, 액자식 구성은 <하하하>(2006)를, 일기라는 형식을 빌린 것은 <밤과 낮>(2009)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보다 ‘북촌’이라는 낯익은 배경을 들고 나왔다는 점에서 <자유의 언덕>은 ‘전형적인’ 홍상수식 영화다.

몸이 아파 요양을 갔던 ‘권’(서영화)은 서울에 돌아와 한 꾸러미의 편지를 건네받는다. 2년 전 자신에게 고백을 했던 일본 남자 ‘모리’(카세 료)에게서 온 편지다. 날짜도 없는 편지들을 읽던 권은 계단에서 실수로 편지 뭉치를 떨어뜨리고, 편지를 모으는 과정에서 순서는 뒤죽박죽이 된다. 편지는 권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 와 북촌의 한 게스트 하우스에 묵은 모리가 겪은 사소한 일상들을 적은 ‘일기’다.

시간의 순서를 무시한 채 진행되지만, 조금 보다보면 영화의 내용은 쉽게 이해된다. 모리는 권을 만나기 위해 한국에 왔고, 여러번의 메모를 남기며 권을 기다린다. 모리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친절한 여주인(윤여정), 오지랖 넓고 사람 좋은 그의 조카 상원(김의성)과 친해지고, 근처 카페 ‘자유의 언덕’의 여주인 영선(문소리)과 뜻하지 않은 애정을 나누게 된다. 형식상 선후 관계, 인과 관계 등의 영화 문법은 붕괴되지만,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많은 에피소드와 등장인물 역시 그 배열 순서와 마찬가지로 큰 의미나 맥락이 없다. 화가 잔뜩 나 상원에게 꽥꽥 소리를 질러대던 게스트 하우스 손님(정은채)은 어느날 나타난 아버지와 함께 조용히 사라진다. 상원은 그에 대해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처녀’라는 추리를 내놓지만, 확실한 건 없다. 경리단에서 함께 술을 마신 외국 남자 역시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이 이와 같지 않은가. 별 의미 없고, 속사정 역시 알 길 없는.

감독의 생각은 영화 속 모리의 대사에서 정확히 드러난다. 모리는 책을 들고 다니며 읽는다. 영선이 모리에게 “어떤 책이냐”고 물었을 때, “시간에 대한 책”이라며 “과거와 현재, 미래는 두뇌가 만든 개념이다. 사실 그런 것은 없다는 내용”이라고 답한다. 영화의 익숙한 문법, 즉 시간의 순차성에 대해 감독은 단호한 ‘거부’ 의사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의 분절성은 모리의 ‘꿈’을 통해 더 극대화된다. 모리는 잠을 많이 자는데 어느 순간 모리의 꿈과 현실은 그 경계가 모호해진다. 영화가 끝나고 나도 과연 권과 모리의 사랑이 이뤄진 것인지, 영선과 모리의 로맨스는 실제였던 것인지 불분명하다.

온통 영어뿐인 연기가 조금 어색할 법도 하지만, 그 역시 ‘외국인을 대하는 한국인의 흔한 자세’로 바라보면 오히려 더할 나위 없이 현실적이다. “음주 촬영에 취해서 노래까지 불렀다”는 카세 료는 홍상수 영화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다소 찌질한 모리 역에 잘 녹아든다.

관객 중 일부는 “또 비슷한 타령”이라는 실망 섞인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늘 그렇듯 홍상수 영화는 비슷한 결에서 작은 차이를 발견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쏠쏠한 재미가 있다.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 오리종티 부문에 진출했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사진 전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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