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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즐거운 전반부, 끔찍한 후반부

등록 2014-12-30 19:44

듀나의 영화 불평
<상의원>은 최근 나온 한국영화들 중 가장 정신분열이 심각한 작품이다. 전반부에서는 “이래도 되나?”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뻔뻔스러운 시대착오 농담으로 코미디를 하다가 후반부에서는 모든 게 갑자기 컴컴해지고 진지해지는데, 과연 이게 한 영화이긴 한 건지도 확신할 수 없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는 외국 관객에게 영화를 보여주면 전반부와 후반부의 감독이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영화’와 ‘외국관객’을 언급한 것은 이런 정신분열적인 태도가 한국 대중 영화에서는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개그와 드라마와 신파를 한 패키지 안에 넣고 잘 섞지도 않은 채 그냥 내놓는 건 여기선 흔한 일이다. <엽기적인 그녀>와 같은 코미디도 그렇고 <관상>과 같은 사극도 그렇다. 이런 태도를 옹호하는 논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원래 삶은 슬프기만 한 것도 아니고 즐겁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 인생 막판은 구질구질하기 마련. 이렇게 보면 즐거운 전반부와 끔찍한 후반부의 배치는 자연사를 가장 그럴싸하게 모방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어떤 통찰력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다. 한국 영화에서 이건 그냥 습관이다. 대부분 이러한 배치는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대신 외부에서 강요된다. 백지상태서 “‘상의원’ 소재로 조선시대 패션 디자이너 영화를 만들어 보자!”로 시작한 이야기는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이 프로젝트가 이런 한국식 전형성을 따른 것은 아무도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상황에서 안전한 길로만 갔기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노를 젓는 사람이 많은 영화에서는 흔한 일이다. 전형성의 성격은 다르지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도 종종 비슷한 함정에 빠진다. 다들 흥행성적 경험으로만 막연하게 알고 있는 가상의 관객들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물론 그 관객들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흐리멍덩해진다. 대중이란 그렇게 쉽게 정의되고 설명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별다른 정보 없이 <상의원>의 시사회에 참석한 나는 보도자료를 읽고 나서야 이 영화의 감독이 <남자사용설명서>의 이원석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남자사용설명서>는 완벽하지는 아니었지만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코미디의 감각을 갖춘 영화로, 이 작품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남자사용설명서>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갖고 있는 이 영화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심지어 전반부 코미디도 마찬가지다.

무리한다면 <남자사용설명서>와 연결점을 찾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찾아낸다고 해도 이 영화에서 전작의 독특한 유머 감각과 리듬감을 찾기는 어렵다. 이 영화의 코미디는 전작처럼 어처구니 없고 황당하지만 전작에서 성공적인 코미디의 배경이 되어 준 무덤덤한 태도와 리듬을 결여하고 있다. 심지어 감독이 가장 잘 하는 영역에서도 충분히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주지 못한 것이다. 코미디와 드라마의 대비가 컸던 것이 이원석의 코미디 감독으로서의 정체성 때문이라는 이론도 이것으로 허약해진다. 이건 그냥 생각없는 습관이었다. 습관에 집착하다보니 정도를 넘어서는 걸 아무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듀나 칼럼니스트
듀나 칼럼니스트
큰 돈이 오가고 많은 사람이 관여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조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조심성이 만들어낸 결과물들은 그 자체가 조심해서 피해야 할 예가 되고 있다.

듀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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