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나의 영화 불평
엑스 마키나
엑스 마키나
<28일 후>의 각본가인 알렉스 갈란드의 첫 감독작 <엑스 마키나>에 대한 기대는 크지 않았다. 제목과 포스터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엑스 마키나>는 말 그대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 즉 ‘기계장치의 신’에서 따온 말이다.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을 받아 예쁜 여자 로봇으로 변장한 알리시아 비칸더의 상반신을 잡은 포스터는 <메트로폴리스>의 마리아에서 이어진 여성 로봇의 전통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은 영화가 나쁘다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모두 그렇게 좋다고 할 수 없는 진부한 습관을 암시한다.
‘기계장치의 신’은 ‘인간이 알아서도 안 되고 건드려서도 안 되는 금지된 신의 영역’과 관련된 종교적 주제를 떠올리게 한다. 대중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각색한 수많은 영화들을 통해 이 주제에 익숙해졌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 감히 생명체를 만들어 신의 영역을 침범하다니!” 여기서 ‘각색물’로 제한한 이유는 정작 메리 셸리는 과학에 대해 그렇게 미신적인 공포심을 품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발 원작을 먼저 읽으시라.)
예쁜 여성 로봇에 대한 판타지는 더 오래되었다. 위에서 <메트로폴리스>의 마리아 로봇을 언급했지만 19세기 빌리에 드 릴라당이 <미래의 이브>에서 다룬 적이 있고, 이는 고대 피그말리온 신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심지어 창세기의 묘사도 은근히 이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습관이라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장르란 원래 관습과 습관의 누적을 통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된 예는 기존의 선입견을 따르느라 자연의 당연한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신의 영역을 생각해보라.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 중 상당수는 창조주 유일신 따위는 믿지도 않는다. 그런데 왜 그런 사람들도 ‘신의 영역’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걸까? 생명이나 자아를 가진 인공지능의 창조가 오로지 가상의 초자연적 존재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미 그건 여러분이 과학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성 로봇도 마찬가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우리가 여자 인간 모양의 기계를 만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여자 인간처럼 행동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왜 C3PO는 무성적인 존재인데 마리아는 여성인가? 로봇에게 성을 주는 작업은 십중팔구 남성을 보편적인 중심으로 놓고 그 다음에 여성의 위치를 정하고 타자화하는 나쁜 습관의 영향을 받는다.
이런 치명적인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갈란드가 준수하기 짝이 없는 SF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그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기도 했다. 갈란드가 했던 것은 엄청난 상상력이나 창의력이 필요한 작업이 아니었다. 그가 한 일은 이렇게 선입견의 영향을 받기 쉬운 재료들을 가져와 성실하게 이야기의 가능성을 탐구했다는 것이다. 최신 과학 지식과 최신 장르 공식을 가져와 꼼꼼하게 대입하는 과정만 거쳐도 쉽게 진부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시 말해 <엑스 마키나>는 관객들의 허를 찌르는 새로운 영화가 아니라 장르 작가들이 소재와 주제에 충실하다면 자연스럽게 나와야 할 바로 그런 영화이다. 그런데도 이게 그렇게 어렵다면 우리는 여전히 선입견의 노예라는 말이며, 그 선입견에는 게으른 SF 작가들의 책임도 상당하다는 뜻이다.
듀나 칼럼니스트
듀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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